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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힘들 때 열어보라" 세상 떠나며 남긴 스님의 편지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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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6)

종교는 없지만, 종교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종교 서적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사진은 일본 선종 겐닌지 사원에서 선사체험 모습. [사진 겐닌지 홈페이지]

종교는 없지만, 종교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종교 서적은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사진은 일본 선종 겐닌지 사원에서 선사체험 모습. [사진 겐닌지 홈페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종교의 가치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내세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안정도 중하고, 삶의 바른 잣대로 기능하는 몫도 크다는 걸 인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믿는 신만이 옳고 위대하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독선적이 아니라면 무욕을 바탕으로 전해오는 종교인들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삶에 등불이 되고 삶의 향기가 된다는 점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 관련 서적을 좋아한다. 물론 교리문답 성격의 책은 제외하고다. 재미도 있으려니와 삶에 쫓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혜를 얻을 수도 있어서다. 적어도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돌아볼 기회도 얻고 삶의 지표를 확인할 수도 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쁨을 주는 그런 책을 만났다. 『힘들 때 펴보라던 편지』 (최성현, 불광출판사). 자연농법을 가르치는 ‘지구학교’를 운영하며 여러 권의 책을 짓고, 옮긴 이가 쓴 책이다. 사실 나름 책을 꽤 본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책을 보고는 여태 지은이를 몰랐던 사실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정도로 이 책은 값지다.

힘들 때 펴보라던 편지, 최성현 지음, 불광출판사.

힘들 때 펴보라던 편지, 최성현 지음, 불광출판사.

책은 일본의 선승(禪僧)들 일화를 엮은 것이다. 사실 선승들이 이야기를 다룬 책은 이미 여럿 나왔고 나름의 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부수고 식의 이야기는, 뭐랄까 깨달음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지 언어나 문자로 전하지 않는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오묘한 지혜가 담겨 있는 듯해 매력이 있는 덕분이다.

한데 이 책은 그간의 이런 부류의 책과 조금 다르다. 우선 중국이 아니라 일본 선승들의 일화를 모았다. 일본 쪽 이야기여서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지혜라는 것이 어디 구원(舊怨)이나 국적을 가릴 것인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종교적 깨달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거울’이 될 만한 일화들이 대부분이고, 여기에 지은이의 해설이 더해져 꽤 쓸모 있는 ‘인생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힘들 때 펴보라던 편지’란 글을 보면 확실히 이 점이 두드러진다. 왕실의 서자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 큰 덕을 쌓았다는 잇큐(一休)란 선승이 주인공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원효만큼 유명하다는 이 스님, 세상을 떠날 때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편지 한 통을 주며 “정말 힘들 때 열어봐라. 조금 힘들다고 열어봐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단다.

세월이 흘러 그 사찰에 큰 문제가 생겨 마침내 승려들이 모여 잇큐의 편지를 개봉했다. 그 편지에 딱 한 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된다”고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여기 더해 ‘한 문이 닫히면 다른 한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며 “받아야 할 일은 받아야 하고, 치러야 할 일은 치러야 한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나니, 마음고생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 오늘을 감사하며 알차게 살라”는 잇큐의 말을 소개한다.

 겐닌지 사원의 모습. 겐닌지 사원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선종 사찰이다. [사진 겐닌지 홈페이지]

겐닌지 사원의 모습. 겐닌지 사원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선종 사찰이다. [사진 겐닌지 홈페이지]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어쩌면 심심한 제목과 달리 뜻깊다. “거의 모든 병은 스승이 하나뿐인 데서 온다”는 라잔겐마(羅山原磨)의 말로 시작하니 말이다. 스승이 하나뿐이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다는 뜻이지만 이는 자기들 것만이 최고인 줄 안다는 맹신에 대한 따끔한 죽비와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이 글 말미에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다”란 종교학의 핵심 명제를 보태며 사랑, 평화, 용서, 자비, 관용으로 살아야 한다는 종교가 서로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이것이 굳이 종교에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스승’은 종교가 될 수도, 정치적 신념도, 출신 학교나 지역이 될 수도 있으니 참으로 새겨들을 만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불교 전문 출판사로 좋은 책을 많이 냈지만 눈 밝은 이들에게나 친숙한 편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도 드러나듯, 만듦새의 아쉬움도 일부 작용한 게 아닌가 한다. 각각의 글 흐름이 산만한 편이고 선승들에 대한 소개도 권말에 몰아 담는 등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에 담긴 지혜는 그야말로 주옥같으니, 어디를 펼치더라도 사금을 캐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책이긴 하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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