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블랙리스트 ‘먹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목이 잘릴 팔자”라는 관상가 김내경의 말에 평생 두려워하다 죽는다. 팔자는 피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사건에 휘말려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죄가 드러나면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 송장의 목 등을 베는 형벌이다.

청교도혁명으로 영국에 공화정을 수립했던 올리버 크롬웰도 찰스 2세에 의해 부관참시당했다. 구원(舊怨)이 있었다. 찰스 2세의 부친 찰스 1세는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와의 내전에서 패한 뒤 왕좌에서 쫓겨나 참수당했다.

유럽으로 도망쳤던 찰스 2세는 10년 만인 1660년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사형 판결에 서명한 법관 등 관련자 59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피의 복수에 나선 찰스 2세가 만든 명단이 바로 ‘블랙리스트(Blacklist)’다. 이른바 ‘정치보복 리스트’다. 영국 극작가 필립 매신저가 1639년 쓴 비극 ‘이상한 전쟁’에 처음 등장한 이 말을 찰스 2세가 사용한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59명 중 13명은 사형, 25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부관참시된 크롬웰의 목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내걸렸다. 블랙리스트의 첫 희생자인 셈이다.

블랙리스트는 이후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 명단’ 혹은 ‘요주의자 명단’ 등의 의미로 쓰였다. 18세기 미국 광산 지역에서 파업 참가 노동자의 명단을 만들어 취업을 막는 데 사용됐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을 휩쓸 때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예술인 블랙리스트가 작성됐다.

‘블랙리스트 리턴 매치’로 정치권이 뜨겁다. 전 정권에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로 맞붙었던 여야가 공수를 맞바꿔 ‘환경부 블랙리스트’로 맞붙었다. 환경부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를 압박하려 ‘표적 감사’를 벌였다는 내용이다. 검찰 조사 결과 관련 문건이 발견되고 관계자 진술도 확보됐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졌을 때 “문재인 정부 DNA에 민간인 사찰은 없다”던 청와대는 관련 문건이 발견되자 “(해당 문건은) 합법적인 체크리스트”라고 해명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0일 "블랙리스트라는 ‘먹칠’을 삼가해달라”는 논평을 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인사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어떤 불이익을 주기 위해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하고 결과를 적은 문서를 블랙리스트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