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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말 실수잦고 남의 말 안들어"|신-최씨가 말하는 「북한견문과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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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일성의 면모>
김일성은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노쇠하고 시력조차 매우 나빠 글을 갈 읽지 못할 뿐만아니라 귀마저 갈 들을 수 없다.
통상 월북한 인민배우 유경애가 입체 낭독한 것을 녹음으로 듣거나 영화나 VTR로 제작한 것을 시청하고 있다. 김이 최근 방북한 작가 황석영씨에게 소설 『장길산』을 읽었다고 말한 것은 허위일 가능성이 많으며 만약 그 소설내용을 알고 있다면 요약된 줄거리를 녹음으로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은 『자기도취 속에 살아가는 횐머리의 늙은 족장』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김은 또 안면에 노인에게서 혼히 볼수있는 검은 반점이 많이 있고 대화중 잦은 말실수와 함께 남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않았다. 김은 평오대성산유원지앞을 흐르는 대동강지류인 합자강 건너편에 위치한 북한의 아방궁인 「주석궁」에 살고 있다. 경비가 삼엄하고 김정일저택과는 지하철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풍문이 있다.
주석궁 본관건물은 약 4백평이상 규모의 석조건물로 건물내부는 대리석으로 치장, 대형 오색분수대와 1천명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연극 공연무대·대형 벽화·에스컬레이터등의 호화판 시설이 있다. 주석궁은 임금님같은 주석이 사는 궁전이라는 비꼬는 말로 공식명칭은 「금수산 의사당」 또는 「주석관」이다.
◇김정일에게 권력승계=김일성은 아들인 김정일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준 상태고 그가 맡고 있는 유일한 기능은 의전적인 최고 통치자로서 외국대표단과 방문자를 접견하는 일이다. 김은 통일및 남북문제에 대해서만 논의할 뿐 기타문제는 김정일이 모든 권력을 장악,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보고하고 있다.
일부 노년층은 김일성에게 전통적인 존경을 표하나 젊은층은 김일성을 배제한 채 김정일에 밀착되어 있으며 김정일의 측근으로서는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대남 사업담당비서 허담·연락부장 정경희등 대남공작기관 간부들이 있다.

<김정일의 면모>
김정일은 작은키(165cm에 뚱뚱한 체격(85kg)으로 인한 신체적인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최씨에게 자기체격을 『난쟁이 똥자루』라고 비하하여 표현했다.
그는 모든것을 흑백논리로만 사고할 뿐 아니라 자기 통제력이 약하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반대의견을 말할 수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해 보였다.
김정일은 또 즉석에서 충동적인 약속을 해놓고도 금방 잊어버리는등 건망증과 변덕이 심한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는 전염병 환자를 가까이 하지않고 거의 매일 집을 소독했다. 최씨가 연금되어 있던 초대소에서 두차례 파티를 열었을 때도 자신이 먹을 음식과 요리사를 데리고 올 정도로 자신의 건강관리에 대해 결벽에 가까울 정도였다.
특히 그는 중앙당사 연회장 오락실에서 마작·블랙잭등을 하면서 승부에 질 경우 게임을 중단하지 않고 이길때까지 판돈을 모두 거는 판쓸이 승부로 결판을 냈다.
김정일은 비인간적인 행동의 한 예로 각종 음란연회를 거의 매주말마다 개최, 무용수들에게 전라로 춤을 추게하고 참석자(중앙당 부부장급이상)로 하여금 이들을 애무토록 하게한 후 이를 보고 즐거워하거나 각종 게임(오락·트럼프·화투) 에서 지는 사람은 삭발, 귀가토록 했다. 김은 본처외에 첩 2명과 생활하고 있으며 생활주변 근무여성을 특별 양성, 성적 유희로 농락했다. 특히 그는 지난77년부터 시·도 예술전문학교졸업반 여학생중 미모의 학생30여명을 선발, 홍콩·마카오등지에 파견, 안마술등 단기간의 연수를 받게한 다음 최종심사하여 집무실과 공관·별장등에 배치하고 있다.

<김정일의 사치생활>
평양시중구역중성동에 대지 2만여평 건평5백여평의 사저(15호사저)가 있는 외에도 평양시내에 수개의 저택과 특각(별장)이 있고 평양교외·평성시·원산시등 전국에 경치좋은 곳에는 어디나 전용특각을 건설했다.
그의 사저와 특각에는 거의 모두 오락실·수영장·사우나실·에스컬레이터등이 시설되어 있고 전건축자재와 실내장식·침대·응접세트·장농등 가구및 TV·냉장고·전축등 전자제품이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온 호화제품이다.
김정일은 수개의 금광을 소유, 채광하여 이를 해외에 수출, 개인 자금으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유사시에 대비, 서방은행에 금괴7t과 거액의 미화를 비밀구좌로 예치, 이것만을 전담하는 측근을 당국에 파견하여 상주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등 자본주의 음악과 영화선호=김정일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는 고위간부들은 거의 모두『목포의 눈물』『찔레꽃』『노란샤쓰입은 사나이』『동백아가씨』『하숙생』『이별』『쨍하고 해뜰날』등을 열창하고 밴드가 연주하는 경음악에 맞추어 서양춤을 추는등 연회분위기는 서울의 어느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영화필름을 보관하는 영화문헌고에는 1만5천여편의 필름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중 대부분이 한국·미국·프랑스·일본등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와 비디오테이프였다.
김정일은 사미자·정윤희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했고, 정이 간통사건으로 피소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북한영화의 권위자=영화이론을 설명한 『영화예술론』을 자신이 직접 집필했다고 하면서 이를 주체적인 예술론이라고 자찬하고 있으며 「영화문헌고」에는 그의 허락없이는 어느 누구라도 출입이 불가능하다.
영화에는 배우·제작진등의 이름을 자막으로 소개할 수 없어 작품은 있으되 작가의 얼굴은 없고 다만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하는 작품에만 「위대한 수령님의 로작」이라고 명시한다. 북한에서는 영화감독을 「사령관」제1조감독을 「참모장」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북한사회>
◇개가죽 수출=북한에서 개는 인민의 중요한 영양공급원이며 그 가죽은 소련에 수출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개기르기를 장려하고 있고 누런개를 최고 품종으로 치고있는데 그이유는 황구가죽을 개승냥이(늑대) 가죽이라고 속여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사정=북한에서 개인 가정집에 전화를 시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그실례로 최고대우를 받으며 영예의 상징처럼 돼있는 인민배우, 공훈배우들 조차 전화를 보유한 사람이 없었다.
◇김일성부자에 축하문 작성=매년 1월1일 김부자에게 각각 보내는 신년 축하문과 2월16일의 김정일 생일축하문, 4월15일의 김일성 생일축하문, 9·9절 축하문등 매년 4번의 축하문 작성을 강요, 북한용어와 김부자 찬양문구에 익숙치않은 신·최부부에겐 이일이 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금강산에 새겨진 우상화문구=금강산 초입 암벽에다 글획하나에 지프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주체」라고 새겼고, 만불상 바위에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좌우명이라는 「지원」, 김일성어머니 강반석을 기린 시구절인 「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 조선 최초의 불요불굴의 여성혁명가」라는 글씨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조선로동당만세」등 구호를 새겼다.

<친북 인사들>
◇윤이유=84년5월께 김정일로부터 윤이유의 도움을 받아 서독을 거점으로 영화활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무렵 방북한 윤씨 부부를 인민문화궁전에서 만나자 『아들 윤우경이 북한에 와서 만수대 무용수 출신 며느리와 결혼하여 살고있는데 감독이 되고 싶어하니 맡아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84년초 청광산여관에서 윤씨를 만났을 때 윤씨는 객실에서 신·최부부와 인사한 뒤 손가락을 입에대고 천장 몇곳을 가리키며 『말조심하라』고 했다.
김정일은 윤이유이 국제적 음악가라는 명성을 이용할 뿐 그의 음악이 북한 사회에서는 아무런 값어치 없는 음악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최덕신=최은희가 만났을 때 최덕신은 중풍이 걸려 입이 비뚤어져 있었으며 북에서 중풍치료를 해주는 것 같았고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려워 평양을 왔다갔다하며 친북활동으로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어 그로부터 돈을 받아 생활하는 것으로 보였다.
최덕신이 쓴 『민족과 나』라는 책은 사상 전향동기, 남한정치권력의 비리, 북한 찬양등의 순으로 되어있는데 최덕신은 북한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하고 김정일에게 아첨하기 위해 이책을 쓴 것으로 보였다.
◇최홍희=84년1월 신상옥이『돌아오지 않는 밀사』촬영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 중간기착지인 노보시비리스크에서 최홍배부자를 만났을 때 동행한 강해룡(조사부 부부장)은 『나이많은 사람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한 최홍배라는 사람인데 1년에 한두번씩 「북한에와 태권도시범을 ,보이고 김정일로부터 3만달러정도씩 받아가는데 최홍배는 마치 그돈을 구걸하러 평양에 오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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