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 장두성|천안문, 우리시대의 분수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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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가 5공의 암울한 터널속에 갇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3년전, 미국무성의 한 고위관리는 뉴욕의 아시아학회모임에서 동아시아의 앞날에 대해 흥미있는 연설을 한적이 있다.
그 요지는 대개 이런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대부분 나라에서는 장기집권자의 교체기를 맞고 있는데 이 시기를 맞아 이들 나라에서 오래 억눌려온 국민들의 욕구가 분출하게 될 것이다. 이 도전을 맞아 대물림 받은 새 지도자들은 현명한 변신을 통해 욕구를 수령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겪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신이란 곧 민주화를 뜻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랜 군사정권들이 속속 문민화로 돌아서고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필리핀에서 이른바 「민중의 힘」이 「마르코스」의 장기독재를 쓰러뜨린 직후였다. 이에 고무받은 「레이건」대통령은 연설 때 자주 『세계에는 지금 민주화의 큰 바람이 일고 있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베트남과 이란, 니카라과 등지에서 친미적 독재정권을 오랫동안 지원하다가 결국 독재가 무너지면서 반미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체험했던 미국행정부는 앞으로 다가오는 동아시아의 독재자의 퇴장시대에는 그런 전철을 결코 다시 밟아서는 안되겠다는 합의를 이때쯤 이룩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미국내 진보세력과 독재국 내부의 반독재 세력은 미국이 공개적으로 독재자를 비난하고 민주화 세력을 경원하라고 권고했지만 별반응이 없었다. 그대신 이른바 「조용한 외교」라는 솜방망이로 민주화를 성취시킬 수 있다는 소극적 입장을 고집했었다. 그러다가 86년「레이건」행정부는 필리핀에서 「마르코스」의 몰락이 분명해지자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미국 정부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그 관리의 분석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는 한국의 전두환대통령, 대만의 장경국총통,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대통령,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등 장기집권자들이 건재해 있었다. 전대통령은 유신정권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이란 점에서 장기집권자로 분류될 수 있었고 나머지 지도자들도 모두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경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퇴장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늘의 세계를 볼 때 그의 진단은 전세계적으로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북한에는 김일성이 퇴장 직전에 있고, 일본에는 리크루트 사건으로 새삼스럽게 돋보이는 자민당의 1당 장기집권이 흔들리고 있다.
동아시아 뿐 아니다. 이란의 「호메이니」, 폴란드의 「야루젤스키」,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가능케 해준 「브레즈네프」세대의 퇴장이 있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최근 배경 천안문 사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시위군중이 거부한 것은 어느 개인, 어느 정책이 아니고 49년이래 권력을 독점해온 장정세대전체에 대한 부정이고 그들이 표방해온 비민주적 「사회주의」건설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49년 혁명의 성공을 통해 잡은 권력을 인민의 이름으로 전횡해왔다. 그러나 진짜 인민들은 이제 모택동·화국봉·강청·등소평 등 이름만 바꾸어가며 지도자의 뜻을 인민의 뜻으로 도용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천안문광장과 주요도시에서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인민의 참된 존재는 다른 모든 아시아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구독재자의 퇴장은 1인 또는 1당 독재행태의 변신을 당연히 수반해야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제 동아시아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나 공산국가 할 것 없이 민주화 변혁의 바람은 일률적으로 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큰 전환기를 맞아 현명하게 변신하는 새 지도층은 살아 남을 수 있겠지만 이에 거역하는 지도자는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혼란속으로 국가와 국민을 휘몰아 넣게 될 것이다.
천안문광장의 시위와 학살과 뒤이은 내란의 위기는 그와 같은 진단이 정확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전환기를 현명하게 맞아들이는 예를 우리는 리크루트 사건을 엄정하게 처리하고 연루된 정치지도자들이 물러난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자민당은 그와 같은 처신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체제 자체로 번지는 것을 막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소련의「고르바초프」가 솔선해서 과거 지도자들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개혁을 강행하고 있는데서도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10년 동안을 끈 끝에 공산권에서는 처음으로 다당제를 채택해 선거에서 공산당의 패배를 감수하고 있는 폴란드에서도 같은 변신을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고있는 변화의 흐름속에서 볼 때 우리가 어렵게 겪고있는 개혁의 진통은 새로운 평가를 받을만하다. 아직도 5공 청산과 광주항쟁의 매듭을 풀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앞에 놓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어려운 고비를 앞서 겪어 나가고 있다.
이 시대의 공통된 변혁의 진통을 먼저 마무리짓고 90년대의 새로운 도전에 국민의 뭉친 힘으로 대처할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정치권과 국민들은 민주화로의 현명한 선택을 서둘러야 할 때다. 천안문에서 일어난 처절한 비극은 물론, 갈등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불안스럽게 내연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사정들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의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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