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재야겨냥한 "양면포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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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대중총재 광주 전주 강경발언 배경>
김대중평민당 총재의 3일 광주·전주 방문길은 김총재를 재야와 광주, 그리고 강경한 정부·여당사이에서 진퇴유곡의 난처한 입장으로 몰아넣었다.
광주에 가서 현정국을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설정하고 청와대회담에서 정부측을 거세게 몰아 붙여 양보를 얻어낼 발판을 마련하려했던 김총재는 급진적 재야와 학생들에 의해 보수대연합을 휙책하는 인물로 찍혀 큰 곤욕을 당해야했다.
물과 모래가 뿌려졌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계란과 돌을 봐야했고 가는 곳곳마다『각성하라』는 구호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러한 학생들을 밀어낸건 광주 시민들이었다. 학생들의 김총재 비난구호를 그저 보고 들으며 가만있던 시민들이 연단에선 김총재를 향해 『물러가라』며 돌과 계란을 던지는 광경을 지켜보고는 학생들을 몰아내버린 점을 보면 김대중 총재에 대한 광주시민의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5·18 반노공투나 이철규군 변사사건등을 빌미로 정권 퇴진운동을 추진하려는 급진재야 운동권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광주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압력이기도 하다.
그런점에서 보면 김총재의 이번 광주방문은 광주 문제해결에 대한 광주시민의 엄청난 기대와 압력을 확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해결의 방식에 있어 협상을 배제하는 전투적 재야의 요구를 부각시키는 결과가 돼 청와대 회담을 앞둔 김총재의 운신의 폭을 한껏 좁혀 놓았다고 볼수 있다. 학생들의 물세례로 난처한 입장에 몰린 김총재는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노대통령의 책임까지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청와대 회담에서도 이같은 분위기를 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총재가 최종목표로 상정하고 있던 정호용의원의 공직사퇴도 광주분위기로 볼때는 차선책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따라서 청와대회담에서는 최소한 정의원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양보가 없는 한 다른문제를 가지고 합의를 볼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려 사실상 청와대회담은 김총재의 광주연설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기어겹게 됐다. 때문에 만약 정부·여당이 이같은 김총재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정의원문제 처리방식에서 공직사퇴등 대안의 검토가 불가능하다는 강경입장으로 나오게 될 경우에는 김총재로서는 그가 공언한 「정권종식투쟁」을 벌이지 않을수 없게된 것이다. 이점에서 전·최씨증언과 정의원 공직사퇴로 문제를 풀어가려한 김총재의 계산은 우선 빗나간 셈이다.
물론 그자신이 설정한 기한이 있기때문에 당장 급전을 벌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로서는 정권 종식투쟁을 펼쳐 나가겠다고 한 자신의 발언 때문에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결과가 됐다.
평민당이 강경입장에 서지않을 수 없게되면 여야간 합의해 놓은 전·최씨 증언문제도 증언만으로 5공 청산을 마감하려 한다는 재야 비난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선증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따라서 증언자체가 불투명해질 가능성 마저도 보이게 됐다
최근들어 김영삼민주당총재가 노정부와의 협력관계를 복원하는 추세에 있어 김총재의 강경입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평민당을 4당체제속에서 외톨박이 신세로 빠뜨릴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더군다나 김총재는 광주의 책임을 전두환·정호용씨로 몰아가려고 하다가 학생들의 비판을 받자 노정권에 대해서도 책임을 떠맡기고, 광주·5공문제가 잘 해결안되면 정권종식투쟁을 벌인다고 함으로써 3·10청와대회담이후 중평반대, 노정권에 대한 협력등 자신의 발언을 뒤집은 결과가 되어 정부측이나 재야측 모두에 스스로의 신뢰성을 떨어뜨린 점도 김총재로서는 비판받을 여지를 남긴 셈이 됐다.
그러나 김총재로서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방안들을 강구하고 있을것이며 그런 점에서 광주·전주사태는 김총재의 협상지위를 강화해 줄수도 있다는 역산도 가능하다.
이미 재야·학생들의 반발이나 광주의 냉담한 분위기는 김총재나 평민당측이 벌써부터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물세례사건 등이 일부의 지적대로 연츨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평민당에는 김총재가 시·도지부 결성 대회참석차 광주로 내려간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부터 일부과격 학생들의 도발이 있을 것 이란 정보가 수없이 접 수 됐었다.
그럼에도 김총재가 모든 가능성을 감수하며 광주행을 결행한 것은 자신이 재야로부터 받고 있는 수난과 제도정치권으로부터 받고있는 고통을 정부나 국민에게 알릴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문익환목사 방북당시에는 재야쪽의 견해에 동조했고 동의대사건뒤에는 보수쪽에 줄을 섬에 따라 재야·보수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아야했던 김총재로서는 자신이 받고있는 양쪽의 압력을 일연의 사건을 통해 현시화시킴으로써 양쪽의 양해를 구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총재는 노대통령과의 청화대회담에서 정의원문제의 처리불가피성을 보다 강력하게 요구할수 있게 됐고 타결방안이나오지 않 경우 책임을 정부·여당에 전가할수있게 됐다.
또 다른 장기적 측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재야세력들의 정치권진입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김총재는 이른바 보·혁대결의 중간지점에서 양쪽을 오가며 운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볼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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