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경영참여, 노동계·시민단체 입김이 먹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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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30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18년도 제6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류근혁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국장과 대화하고 있다. [뉴스1]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30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18년도 제6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류근혁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국장과 대화하고 있다. [뉴스1]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칼날은 시민·사회단체 위원들의 입김이 향배를 결정했다. 31일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2019년 제2차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경영참여'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의결했다.

이날 회의는 오전 8시부터 시작해 12시쯤 끝났다. 예상대로 회의에선 격렬한 공방이 오갔다. 기금운용위원 11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경영참여를 반대하는 위원 5명과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찬성하는 시민·사회단체 인사 6명의 주장이 맞서면서다.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참여에 반대하거나 신중해야 한다는 '신중론자'들은 명확한 기준이나 근거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펼쳤다. 또, 경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 대상 기업이 수백 곳에 달한다는 점도 주요 반대 논리로 나왔다. 포스코·현대모비스·KT&G 등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인 기업들은 갑질 등 오너 리스크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 국민연금이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면 경영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1일 서울 중구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2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대한항공 노동조합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서울 중구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2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대한항공 노동조합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금운용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한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경영참여 반대 입장인 위원들은 만약 경영참여쪽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면 언론은 물론 기업에서도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 요건에 관한 기준이나 절차를 궁금해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이번 논의를 촉발한 대한항공 조양호 일가 사태 사례를 봐도 경영인의 행위가 기업 주가 하락이나 주주이익 훼손을 야기했다는 근거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본부장은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 가능한 기업만 해도 300개에 이르는 상황에서 경영에 참여하게 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오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우려도 주요 반대 논리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영 참여를 주장하는 위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찬진 참여연대 변호사를 비롯해 민주노총 위원, 한국노총 위원, 요식업중앙회 추천 위원, 보건사회연구원장, 국민연금 이사장 등 6명은 지난해 4월 조현민 전 사장의 이른바 '물컵 갑질'로 촉발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비도덕적 행위를 문제 삼으며 찬성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미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을 통한 기업 견제 기조가 발표된 상황에서 다시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경우 발생할 후폭풍도 이날 회의에서 찬성 측의 주요 견해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공정경제 전략회의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신중론자와 찬성론자의 좁혀지지 않는 주장을 중재한 인물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박 장관은 표결에 부치는 것 보다는 국민연금의 기업에 대한 경영참여를 최소한으로 하자는 중재안을 현장에서 내놨다. 이날 회의의 결론이 이사가 회사 또는 자회사와 관련해 배임·횡령죄로 금고 이상의 형 선고가 확정된 때에는 결원으로 본다는 내용이 포함된 정관변경 주주제안으로 나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본부장은 "이날 회의에 참여한 위원들 성향에 따라 시민·사회단체 측에서 찬성표가 많아 표결에 부쳐졌으면 찬성 안이 통과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며 "회의의 진행 판도도 시민단체 분들의 성향을 따라가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학계와 경제계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번 결정은 매우 충격적"이라며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결여돼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소신 있게 하려면 한진칼·대한항공 둘 다 똑같이 경영에 참여하거나 안 하거나 해야 했는데, 10%룰 때문에 어디는 참여하고 어디는 안 한다는 것은 정부 입김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 교수는 "조양호 일가의 갑질을 견제하기 위해 '행동주의펀드'의 갑질이 용인된 판국"이라고 부연했다.

국민연금 주식보유 기업 중 최상위권에 있는 한 기업의 관계자는 "주주가치 제고와 방만경영 예방 등 취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국민연금이 많은 대기업의 제2, 제3주주인 상황에서 주주권을 과도하게 행사하게 되면 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연금이 주요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에 대비해 외부 컨설팅과 대응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재무적 투자자로 생각하던 국민연금이 '행동'에 나설 경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을 매집해야 할 수도 있고 경영의 자율성이 침해될 소지도 있다"고 우려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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