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결국 미국 하기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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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5백년 가까이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였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는 로마에 골치 아픈 존재였다. 동화되는 듯하다가도 툭하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괴롭혔다.

프랑스가 또 다시 미국의 속을 긁어놓고 있다. 이번에는 이라크 주권 이양문제다. 프랑스는 조속한 주권이양을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의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하루 빨리 미국이 주권을 이라크 자치정부에 넘기고 철수하는 것이라고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프랑스의 주장이 이라크를 더 큰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발상이라며 주권이양은 시기상조라고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국제사회가 병력과 자금으로 미국을 도와주는 것이 이라크가 조속히 안정을 되찾는 길이라고 역공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막대한 돈과 위험을 감수하며 이라크를 점령했다. 3백여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그동안 쓴 돈만 최소 6백억달러에 달한다. 미국이 듣기에 프랑스의 주장은 계산도 안 끝났는데 포커판에서 빠지라는 얘기다.

속사정 뻔히 알면서 정의의 대변자인양 주권이양 문제로 미국을 또 다시 걸고 넘어지는 프랑스가 미국의 눈에는 골치 아픈 갈리아로 비칠 수도 있다. 미국은 프랑스의 대의명분 뒤에는 테이블 밑으로 적절한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술수가 감춰져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23일 개막된 유엔 총회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국가 정상 중 첫번째로 연설을 했다. 바로 이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 차례가 되자 수행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미 하버드 대학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현재의 국제질서를 단극과 다극이 공존하는 '단-다극(uni-multipolar)체제'로 보고 있다.

냉전 종식으로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라는 수퍼파워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일-프랑스 연합, 러시아, 중국, 인도 등 지역 강대국들이 메이저 파워로 기능하고 있는 '혼성(hybrid)체제'라는 것이다.

시라크는 부시가 빠진 유엔 총회 연설에서 "개방된 세계에서는 누구도 모두의 이름으로 독자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미국이 단극체제의 맹주처럼 행동하고 있는 데 대한 항의 표시다.

미국은 이라크라는 수렁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미군의 전사 소식이 들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고, 매달 39억달러를 병력 유지와 재건 비용으로 이라크에 쏟아붓고 있다. 전후복구비 2백억달러를 포함해 8백70억달러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날아온 내년도 청구서 금액이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실업률은 올라가고 있다.

국내 여론이 점점 등을 돌리면서 부시의 지지율은 취임 후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민주당의 새 대선후보로 등장한 웨슬리 클라크 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사령관과 맞붙으면 3%포인트 차로 진다는 조사까지 나왔다. 지난 5월 탑건 조종사 차림으로 이라크전 승리를 선언할 때만 해도 부시의 재선은 떼어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방주의 외교노선과 경제문제에 대한 국내 여론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부시가 유엔에 나가 지원을 요청한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화해 표시라기보다 국내 여론 무마용이다.

헌팅턴은 단-다극체제가 결국은 다극 체제로 갈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필연이다. 미국의 패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결국 미국 하기에 달렸다.

10년 만에 끌날 수도 있고, 50년, 1백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할 말만 하고, 남 얘기는 듣지도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런 옹졸한 태도로는 오래 가기 어렵다. 내년 미 대선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다.

배명복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