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베, 시정연설서 한국 부분 통째로 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아베 신조

아베 신조

아베 신조(安倍晋三·얼굴) 일본 총리가 28일 시정 방침 연설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의 정기국회 대통령 시정연설에 해당하는 총리 시정 방침 연설에서 한국과의 양자관계 대목이 빠진 건 2012년 말 아베 총리의 재집권 이후 처음이다. 아베 총리는 “북한과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하겠다. 그를 위해 미국과 한국 등 국제사회와 긴밀히 연계해 나가겠다”는 대목에서 ‘한국’이란 단어를 단 한 차례 사용했다. 그는 이어 “북동아시아를 안정된 평화·번영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의 발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근린(近鄰·이웃나라) 외교’를 힘 있게 전개하겠다”고 말했지만 근린 외교 대상으로서 한국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2012년 총리 재집권 이후 처음 #“북한과 국교 정상화가 목표”

그동안 아베 총리는 한·일 관계가 어떻게 출렁이느냐에 따라 연설 내용을 조절해 왔다. 재집권 직후인 2013년 1월 “자유와 민주주의 등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며 “21세기에 맞는 미래지향적이고 중요한 파트너 관계 구축을 목표로 협력해 나가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양국 간 위안부 합의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던 지난해엔 “문재인 대통령과는 지금까지의 양국 간 국제 약속, 서로의 신뢰 축적 위에서 미래지향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협력관계를 심화시켜 가겠다”고 말했다. 위안부 합의를 지칭하는 ‘국제 약속’이란 표현을 쓰면서도 2017년 연설까지 포함됐던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라는 표현은 뺐다. 올해는 대법원 징용 판결과 레이더 문제로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아베 총리는 한국 관련 대목을 완전히 배제했다.

닛케이 조사 “한국에 강하게 대응해야” 62% … 고노는 “국제적 약속 준수 요구” 

미·일 동맹 강화, 중국과의 관계 개선, 러시아와의 영토 협상, 북한 문제 외에 중동 평화와 아프리카 개발 지원 문제까지 자세히 언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도쿄의 한국 외교 소식통은 “시정연설엔 기본적으로 상대국에 대한 긍정적·협력적 메시지를 담을 수밖에 없다”며 “한국에 대해선 그런 기본적 메시지조차 보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회견 모두발언에 일본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을 똑같이 되갚았다”는 해석도 있다. 문 대통령 회견을 놓고 일본 일부 언론과 정부에선 “대일 외교에 관심이 없다” “관계 개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관련기사

한국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아베 총리의 태도는 일본 국민 여론에 편승한 측면도 있다. 28일 보도된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 여론조사에서 레이더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응답이 62%에 달했다.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는 24%, “조금 더 한국 측 주장을 들어야 한다”는 7%뿐이었다. 요미우리신문 조사에서도 “한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응답이 71%, “일본이 한국에 양보해야 한다”는 응답은 22%에 그쳤다.

한국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아베 총리 지지율은 뚜렷한 상승세다. 닛케이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전달보다 6%포인트 오른 53%, 요미우리에서도 2%포인트 오른 49%였다. 일본 언론들은 양국 간 대립이 아베 총리 지지율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도쿄의 일본 측 소식통은 “이미 지지율 상승효과를 누린 아베 총리로선 구태여 연설에서 한국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며 “강경한 일본 내 여론을 감안하면 오히려 언급하지 않는 쪽이 한국을 배려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신 악역을 맡은 건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상이었다. 그는 ‘외교연설’에서 “(1965년)청구권 협정, 위안부 합의 등 국제적인 약속을 확실히 지키도록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며 “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이름)에 대해서도 일본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양국 관계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본 정부 관계자는 “여야 의원들이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 주문을 아베 총리에게 쏟아낼 150일간의 일본 정기국회, 한국 내 반일 분위기가 고조될 3·1절까지의 흐름을 어떻게 관리할지가 고비”라고 전망했다.

한편 우리 군 당국은 일본의 저공 위협비행 문제를 4월 실무급 회의가 예정된 서태평양지역 협의체인 ‘서태평양해군심포지엄(WPNS)’에서 공론화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WPNS에서 이번 사안에 대해 논의가 있을 것”이라며 “국제적인 규범, 관례를 결정하는 것이 앞으로 이 같은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