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처마다 '쾅' … 강한 남자 이승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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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지닌 이승엽(사진)은 타고난 승부사다. 작은 승부처에서는 팬들을 가끔 실망시킬지 몰라도 큰 승부처에서는 호락호락 물러선 적이 거의 없다.

이승엽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홈런으로 지난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터뜨린 3점 홈런을 꼽는다. 그는 팀이 4-7로 뒤져 패색이 완연한 9회말 1사 1, 2루에서 LG의 특급 마무리투수 이상훈에게서 동점 3점 홈런을 때렸다.

그는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5차전까지 20타수 2안타에 홈런은 한개도 치지 못하는 극도의 부진으로 팬들의 비난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홈런은 가장 절실히 요구될 때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삼성은 21년간 맺힌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 수 있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올림픽 메달을 노리던 한국은 예선탈락의 위기에 처했다. 이승엽도 발목 부상이 겹치며 10타수 1안타에 그쳐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이 와중에 일부 선수의 카지노 출입 사실이 전해졌다. 팬들의 분노는 대단했고, 선수단의 사기는 엉망이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이 이승엽의 내재된 승부욕을 한껏 자극했다. 이승엽은 최대의 관심거리였던 일본전에서 당시 일본 야구의 최고 영웅 마쓰자카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뽑아냈다. 덕분에 한국은 예선탈락의 위기에서 벗어나 결국 동메달을 안고 개선했다.

지난 6월 22일 통산 3백호 홈런도 그렇게 나왔다. 상대 투수들의 견제와 언론의 집중 관심 속에서도 그는 팀이 위기에 몰리자 여지없이 홈런을 때려냈다. 당시 삼성과 1, 2위를 다투던 SK전에서 8회말까지 2-3으로 끌려가 팀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승엽은 호투하던 김원형으로부터 통렬한 동점홈런을 뽑았다.

SK가 9회에 동점을 만들자 이승엽은 9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응수했다. 상대 투수는 당시 최고 구위를 뽐내던 SK의 마무리투수 조웅천이었고, 구질은 '미리 알아도 치기 어렵다'는 조웅천의 승부구 싱커였다.

25일 터진 시즌 55호 홈런도 삼성과 기아의 외나무다리 대결에서 나왔다. 상대 투수는 이승엽이 "까다롭다"고 자인했던 기아의 에이스 김진우였다. 공도 몰리긴 했지만 시속 1백47㎞짜리 강속구였다.

"경기에 지면 홈런이 무슨 소용 있느냐"는 그의 말은 야구는 개인경기가 아니라 팀경기이며, 홈런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재확인시켰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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