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큰 웅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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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 광주의 5·18은 온 나라에 대해 값진 방향제시를 보여주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과 아직도 다하지 못한 말을 가슴속에 가득 품고서도, 더욱이 이철 규 군 변사사건이란 자극적인 사건을 맞고서도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9년 전의 비극을 되새기는 5·18을 아무런 충돌이나 조그마한 불상사 없이 평화적으로 추념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의사가 무엇인지를 더할 수 없는 웅변으로 표시했다.
가장 격정의 폭발이 나오기 쉽고 감정적 충동을 강렬히 받을 상황에서 광주는 자제하고 질서를 지킴으로써 성숙된 시민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일부 과격세력들의 폭력적 투쟁방식이 온 나라의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이런 시점에서 광주가 보여준 이런 성숙된 시민의식은 각종 사회운동이나 투쟁방식이 어떠해야할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큰 방향제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과격세력들이 그들의 폭력행사의 한 근거로 9년 전의 광주비극을 들먹이곤 하지만 이번에 광주는 9년 전에도 그랬듯이 광주의 소망이 평화와 민주에 있지 폭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명백백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광주의 평화와 민주의 소망은 이번의 평화시위로 더할 수 없는 무게로 온 나라에 확실히 전달되었다.
이제 이런 광주의 소망을 바탕으로 9년 전의 그 비극은 더 이상 우리사회의 부담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길이 기리고 잊지 않고 우리사회의 미래설계의 가장 소중한 기본의 하나가 될「정신」으로 승화돼야 마땅하다. 9년 전 그런 참혹한 희생을 치르면서 광주가 요구했고, 그 9주년을 맞아 이번에 다시 확인한 반 독재·민주화와 평화를 우리사회 최고의 가치와 규범으로 정착시키고 제도화하는 일을 이제부터라도 서둘러야 한다.
이런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우선 아직도 남아있는 광주문제의 마무리작업부터 빠른 시일 안에 끝내야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증언으로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일,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조속히 실시하는 일, 영령을 기리고 그 정신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깨우쳐주게 하는 기념사업 등을 빨리빨리 추진하고, 화해와 용서로 마무리해야 한다.
마침 여야는 중진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만큼 광주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그 소망을 구현한다는 자세로 이런 문제들을 빠른 시일 안에 대국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와서 자질구레한 조건이나 절차를 흥정하듯이 이 문제를 다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직 대통령들도 더 이상 증언을 기피하거나 늦출 생각은 않는 게 좋겠다.
요컨대 정치권은 평화시위로 나타난 광주의 뜻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오늘날 온 국민이 열망하는 반 폭력과 민주화의 의지를 5·18 9주년의 평화시위에서 광주시민들이 가장 극적으로,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보며 광주문제의 해결방향도 결국 여기에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광주의 소망을 구현해 나감으로써 과거비극으로서의 광주보다는 우리 미래의 길잡이로서의 광주 정신이 자리잡도록 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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