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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충무공 동상 이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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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현재 서울 도심의 중심축은 경복궁에서 세종로·태평로를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광화문~광교~남대문이 중심가였다. 그걸 일본이 태평로를 확장해 지금처럼 바꿨다. 일제 강점기의 일이었다. 용산에 있던 일본군이 경복궁에 쉽게 진입하려는 의도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옛길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하지만 비용이 막대했다. 박 대통령은 대신 이렇게 결정했다. “세종로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그렇게 탄생했다. 제작은 고(故) 김세중 서울대 교수가 맡았다. 동상 높이 6.3m(좌대 포함 16.8m), 무게는 8t이다. 당시엔 이만한 동상을 만들 재료가 모자랐다. 탄피에 놋그룻·고철까지 동원했다. 그래도 제때 재료를 대지 못해 수시로 만들기를 멈췄다. 그러기를 13개월. 1968년 4월 27일 제막식을 했다.

충무공 동상은 모함에 빠져 고초를 당했던 이순신 장군 본인만큼이나 질곡을 겪었다. 제막 직후부터 “잘못 만들었다”는 비판이 터졌다.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 마치 장수가 항복하는 모습 같고, 칼은 일본도이며, 갑옷은 중국식이라는 것 등이었다. 70년대 후반 정부는 동상을 다시 만들기로 결정했으나 10·26 등으로 흐지부지됐다.

94년 정부는 동상 이전을 검토했다. 세종로에는 세종대왕상을 세우고,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거리 이름에 맞는 동상 위치 찾아주기’였다. 하지만 “충무공상은 이미 세종로의 상징이 됐다”고 서울시가 반대해 무산됐다. 2004년 세종로 보도를 넓히면서, 2008년에는 지금의 광화문 광장을 만들면서 다시 이전론이 나왔다가 들어갔다. 2004년 인터넷 여론 조사에선 시민 87%가 충무공상을 옮기는 데 반대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이전이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서울시가 그제 광화문 광장 확장 방안을 발표하면서다. 충무공 동상을 정부서울청사 앞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번에도 발표하자마자 반발에 부닥쳤다. 광화문 광장 공모 심사위원들도 당선작을 뽑으면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역사성이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토를 달았다. 서울시는 “공론화를 거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공론화를 말릴 이유는 없다. 옮길지 말지 시민의 뜻을 물어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이자 문화다. 그러나 공론화한답시고 묘한 진영논리를 끌어다 붙여 날 선 대립을 벌이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건 충무공도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까.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