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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드러난 영국 왕실의 민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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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영국 언론의 보도가 이상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의 교통사고와 관련해서다. 필립 공은 한국 나이로 올해 98세다. 런던 동부 노퍽주에 있는 왕실 별장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 도로에서 그가 직접 몰던 레인지로버 승용차가 다른 SUV 차량과 부딪혔다. 그런데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불분명했다. 필립 공이 사고와 ‘관련이 있다’고만 알려졌다.

오히려 관심은 98세나 되는 그가 아직도 직접 운전한다는 사실에 집중됐다. 필립 공은 타던 차량이 운전석 쪽으로 전복됐는데도 거의 다치지 않았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지나가던 운전자가 그를 차 밖으로 끄집어냈다. 다른 SUV 차량에 타고 있는 여성 두 명은 경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정도였다.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는 영국 여왕의 남편이자 100세를 코앞에 둔 필립 공의 소식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반응으로 끝날 분위기였다. 하지만 피해자 여성이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러지에 폭로했다. 손목이 부러져 깁스한 그는 울면서 친구가 몰던 차량을 필립 공이 들이받았다고 말했다. 피해 차량에 9살 난 아이도 타고 있었다고 공개했다. 현장에서 필립 공이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셨다”고 했지만, 날씨는 흐렸다고 주장했다. 간신히 생명을 구한 그들에게 필립 공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고 이 여성은 밝혔다.

피해 여성을 언론 인터뷰로 끌어낸 것은 왕실의 후속 대응이었다. 여왕이 바쁘더라도 왕실로부터 위로 편지나 꽃이라도 보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전화는 왕실과 연결된 경찰로부터 걸려왔다고 한다. 피해 여성은 “이해가 되지 않는 메시지였다. 여왕과 필립 공은 당신으로부터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사과도 아니고 안부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피해 여성에 따르면 자신을 구해주려던 운전자들이 필립 공을 알아보고 그리로 몰려갔고, 2시간 만에야 병원으로 이송됐다. 보도가 나간 이후 왕실은 피해자와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고 주장했다. 피해 여성이 “사고 현장에서 필립 공이 우리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말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와 위로인 듯하다.

필립 공은 사고 차량과 똑같은 레인지로버를 제공받았다. 그런데 왕실 별장 인근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 또 운전하는 사진이 찍혀 보도됐다. 영국의 상징으로 인식돼온 왕실의 속살은 이렇게 드러났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을수록 자세를 낮추고 스스로를 제어해야 한다. 민낯은 한순간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힘 없어 보이는 민초도 유튜브로, 소셜미디어로, 언론 인터뷰로 충분히 할 말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