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용맥을 건드린 대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신경진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우리는 용을 이어온 사람(龍的傳人)이다.” 지난 2017년 11월 8일 자금성 태화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용의 후손을 자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중국은 풍수를 따른다. 땅의 기운은 용맥(龍脈)을 따라 흐른다. 쿤룬(崑崙)에 뿌리를 뒀다는 용맥은 친링(秦嶺) 산맥이 잇는다. 한·당(漢唐) 제국의 수도 시안(西安)시 아래 축선이다. 인접한 화산(華山)이 무협지의 무대가 된 이유다.

새해 벽두부터 용맥이 요동쳤다. 9일 중국중앙(CC) TV가 43분짜리 ‘친링 불법 별장 척결’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다. 친링 산맥 산기슭 천여 채의 빌라를 철거한 전말을 다뤘다. “지방의 적당주의, 형식주의, 관료주의 응징”을 외치며 용맥을 훼손한 난개발 사건이 대형 정치 스캔들로 번진 과정을 파헤쳤다. 용맥을 망가뜨리고 시 주석의 여섯 차례 지시까지 무시한 산시(陝西)성은 쑥밭이 됐다. 시안시 전 서기는 무기징역, 조사받은 관련자만 1000여 명이다.

친링 사건은 시 주석의 절대 권력을 웅변한다. 시작은 2014년 CC-TV의 친링 난개발 폭로였다. 시 주석이 첫 지시를 내렸다. 그때는 ‘산은 높고 황제는 멀었다’. 20여 일 뒤에야 조사팀을 꾸렸다. 퇴직 관리가 팀장을 맡았다. 불법 별장 202채를 철거·몰수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허위 보고서다. 시 주석은 지시를 거듭했다. 복지부동이 계속됐다. 지난해 7월 불호령이 떨어졌다. 현대판 암행어사가 직접 나섰다. 쉬링이(徐令義) 중앙기율위 부서기가 내려왔다. 불법 별장 1194채를 때려 부쉈다.

파장은 컸다. 8900만 당원이 다큐를 집단 시청했다. 정치 기율 다잡기 운동이 시작됐다. 정치 기율은 곧 절대복종이다. 중앙의 명령이 최고 지도부 거주지 문밖을 못 나간다던 ‘정령불출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시대가 끝났다. ‘위에서 정책을 내리면 아래는 대책을 세운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융통성도 사라질 기세다. 최고 지도자의 지시가 정부 문건보다, 문건이 법률보다 무서운 곳이 중국이다. 친링 사건은 지방 제후 권력에 밀리던 중앙 황제 권력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정표로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여기에 ‘중화공동체’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이론가 판웨(潘岳) 중앙사회주의학원 서기가 지난달 ‘중화공동체와 인류운명공동체’란 글을 학습시보에 실었다. 범중화권의 단결을 호소했다. 역사공정도 꿈틀댄다. 지난 2일 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역사연구원이 들어섰다. 시 주석은 축전을 보냈다. 중화사상이란 유령이 부활하는 분위기다. 용맥을 손 본 ‘시진핑 절대 권력’은 한국 외교의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