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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표를 얻으려면 패를 보여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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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호 29면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당신은 유모가 있나요?”

평등 위해 성장 희생하는 문 정부 #성장 위해 불평등 허용하려는 보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영원한 대립 #대오보다 대안 제시가 우선이어야

정의(正義)에 대해 강변하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소피스트 철학자 트라쉬마코스가 던진 질문이다. 코흘리개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데 코를 닦아줄 유모가 있느냐는 조롱이었다. “양을 잘 보살피는 게 참된 양치기이듯, 자신의 이익보다 자신이 통치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참된 통치자”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었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한다.

“정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보다 언제 어디서든 적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사람은 세금도 정직하게 내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속임수로 세금을 덜 내며 자기 배를 불리지 않소? 따라서 정의는 더 적은 이익을 가져와 인간을 덜 행복하게 만들고, 불의는 더 많은 이익을 챙겨주기에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오.”

“약자를 이롭게 만드는 강자의 양심적 노력이 정의”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정의란 강한 자를 더 이롭게 한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그럼 정의가 악덕이냐”는 소크라테스의 반격에, “천만에. 정의는 고매한 선(善), 불의는 ‘융통성’!”이라고 경쾌하게 정의(定義)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내친 김에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누가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을 뿐더러 시민들을 납치하고 노예로 삼는 데 성공하면 그는 수치스런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행복하고 축복받았다는 말을 듣지요. 이처럼 불의가 대규모로 저질러질수록 정의보다 더 강력하고 더 자유로우며 더 주인답다오.”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감각이다. 이처럼 우아한 이상주의와 냉정한 현실주의의 대립은 기원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서양만 그런 게 아니다.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기원전 현실주의를 외쳤던 법가(法家) 한비자가 있었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사람들이 선량하기를 기대하지 않고 비리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한다. 나를 위해 선량해질 사람은 나라 안에서 열을 헤아릴 수 없을 터이지만 사람들이 비리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한다면 온 나라를 가지런히 다스릴 수 있다.”(『한비자』 ‘현학’)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18세기 영국의사 버나드 맨더빌이 『한비자』를 읽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애덤 스미스에게 영향을 미치는 풍자시 『꿀벌의 우화』에서 한비자와 똑 같은 주장을 한다.

“나라 전체로서는 정직함에 기댈 것이 아니라 필연성에 기대야 한다. 잘살고 못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

한 세기 뒤에 칼 마르크스가 한비자나 맨더빌을 읽었더라면 그가 추구하는 정의와 이상은 좀더 현실감각으로 무장했을 터다. 그랬다면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학자들로부터 “역사의 종언”이라는 소리를 듣는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마르크스의 잘못은 내재적으로 정의로운 경제 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우연한 미덕과 양심, 선행 따위를 지나치게 믿은 것이다.

이 영원한 논쟁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도대체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보수정당을 한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게 나라냐”는 자조 속에서 탄생했다. 당연히 정의와 공정에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그러다 보니 최적의 평등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경제성장이 얼마나 희생될 수 있는지 두드려보고 있는 것이다. 필연성이 담보되지 않은 ‘고매한 선’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 현실의 벽에 막혀 예상보다 큰 후유증에 고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게 옳지 않다고 본다면 반대 논리를 개발하고 제시해야 한다. 한비자나 맨더빌의 현실감각으로 무장해서 트라쉬마코스처럼 분연히 나서야 한다. 최적의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융통성’ 있게,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보수정당들의 모습은 어떤가. 고민이나 노력은커녕 상대의 실수만 기다리고 있다. 작은 실수라도 하나 나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다. 실수한 상대만큼이나 강한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사냥 실력도 보잘것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반문(反文)연대의 단일대오’만 주야장천 외친다. 과연 누구를 위한 단일대오인가. 그래서 요행히 정권을 잡는다면, 자기들만 좋을 뿐 이 나라 국민들이 얻는 건 또 하나의 실력 없는 정부 말고 또 뭐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비자나 맨더빌이 말하는 필연성으로 움직이는 체계적 사회가 아니라 대규모 불의가 주인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게 먼저다. 그 대안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대오다. 표를 얻으려면 먼저 패를 보여라.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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