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1.08인구재앙막자] 변변한 직장이 없으니 결혼 미룰 수밖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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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 후 4년째 구청서 아르바이트

김동욱(29.가명)씨는 2002년 3월 군 제대 후 햇수로 4년째 구청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일하고 받는 일당은 3만5000원. 그나마 10개월 이상 고용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6~7개월 단위로 일하다 쉰다 한다. 김씨는 원래 용돈이나 벌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붙박이' 일자리가 돼버렸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지방대 사회계열을 졸업한 그는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수백 군데 제출했다. 면접 본 횟수도 수십 번이다. 9급 공무원 시험도 네 번이나 쳤다.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땄다. 하지만 그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김씨는 지금 취업을 포기한 상태다. 대신 창업을 하기 위해 퓨전 주점 같은 업종을 알아보고 있다.

김씨에겐 대학후배인 여자친구가 있다. 여자친구 집에선 결혼을 서두르고 싶어하는 눈치다. 김씨는 안정된 직업을 갖기 전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김씨는 "자기 혼자 살기도 어려운데 결혼하고 가장이 될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느냐"며 "나처럼 직장이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 30대 중반에도 고시촌.대학원으로

이동환(33.가면)씨는 올해 대학원 법학과(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번이 두 번째 석사과정이다. 서울소재 명문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재학 시절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대학 다닐 때는 고시반에서 살다시피 했다. 졸업 후엔 신림동 고시촌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이씨는 번번이 고시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이씨가 서른이 되자, 집에서는 차라리 취직을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는 중견기업 공채로 취직을 했지만 일주일도 안 돼 그만뒀다. 일에 비해 보수가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높아진 '눈높이'도 문제였다.

이씨는 다시 고시공부에 매달렸지만 예전보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고시촌에서 알게 된 선후배끼리 술 먹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해부터는 고시촌에서 나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고시원 숙식비용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서다. 고시촌에서 지내려면 최소 월 1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잠만 자는 고시원비(20만원), 식비(30만원)에 학원비.책값.용돈이 50만원 정도 추가된다.

2남1녀 중 막내인 이씨의 고시원 비용과 용돈은 대학 교수로 정년 퇴직한 아버지 몫이다. 아버지의 연금에서 돈을 타 쓰기가 송구스러울 때가 많다. 올해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는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한소리'를 들었다. "이제 네 앞가림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질책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씨는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대학 때 만난 여자친구는 3년 전 떠나갔다. 그는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그녀를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데 기다려 달라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안정된 직업을 갖기 전까지 결혼은 나에게 미친 짓이다."

# 취업 준비하려 졸업 늦추기도

2년제 기능대학(폴리텍)에서 산업설비를 전공하는 박기용(33.가명)씨. 그는 4년제 대학(전기공학)을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다닌 경력이 있다. 박씨는 좀 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해 기능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기능대학을 졸업하면 해외건설 쪽으로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다.

예전 같으면 노총각 소리를 들을 만한 나이지만 박씨는 좋은 직장을 구할 때까지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결혼조건은 경제적 기반"이라며 "마흔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해야겠지만 안정된 기반을 닦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기능대학에는 박씨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재입학한 나이 많은 학생이 꽤 된다. 대부분 좀 더 대우가 좋거나 장래성이 나은 직업을 구하려고 대학을 두 번 다니는 것이다.

대학생의 재학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취업전문 포털 '인크루트'가 1997~2005년 4년제 대학 졸업자 23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남자는 대학 입학에서 졸업까지 평균 7년이 걸렸다.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졸업자(6년1개월)보다 11개월이 늘어난 것이다. 군 복무기간(육군)이 93년 30개월에서 2003년 24개월로 6개월 단축된 점을 감안하면 실제 재학기간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1년5개월 정도 늘어난 셈이다. 대학생들의 재학기간이 늘어난 것은 어학연수, 자격증 취득 준비, 고시 공부 등 취업 준비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청년층이 졸업한 뒤 첫 직장을 갖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지난해 평균 10개월이나 된다. 첫 직장을 갖더라도 근속기간은 21개월에 불과하다.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더 나은 직장을 구하려고 중도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청년층의 구직난은 결혼을 늦추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최근 전국 8개 대학 재학생 528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결혼시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남학생은 '직업상 안정'(36.1%)을 꼽았다. 여학생도 '직업상 안정'(20.4%)이라는 응답이 '이상적 배우자감을 찾은 때'(24.4%)에 이어 둘째로 많았다. 남녀 모두 안정된 직업이 있어야 결혼을 생각한다는 얘기다.

◆ 특별취재팀=송상훈 팀장, 정철근.김정수.김영훈.권근영 사회부문 기자, 염태정.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김은하 탐사기획부문 기자, 조용철 사진부문 부장, 변선구 사진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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