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水 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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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화시대의 권력교체 명분은 천재지변이었다. 권력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집권자는 가뭄으로 권력을 잃고, 홍수를 이용해 권력을 잡곤 했다.

기원전 10세기께 이집트의 피지배 계층이었던 수십만명의 이스라엘 부족에게 신권적 지도력을 행사한 사람은 모세였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는 열가지 하늘의 재앙을 일으켜 이스라엘에 대한 파라오의 지배권력을 빼앗았다.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이행하던 초기 고구려 설화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기원전 58~19)이 주변 강대국인 비류국을 점령할 때다.

고주몽은 비류국의 늙은 왕인 송양과 말싸움.활싸움을 해서 이겼지만 그를 승복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고주몽은 '하느님의 아들'답게 비류국에 대홍수를 일으켜 민심을 흔들어 놓은 뒤 송양으로부터 나라를 이양받았다.

송양이 나라를 넘길 결심을 할 때 그의 한 신하는 "안 됩니다. 이번 수해는 일시적인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의 민심이란 마치 달이 모습을 바꿔가듯 금세 변하는 법입니다"라고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신하가 "민심은 천심, 한번 바뀐 민심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권력이양을 못박았다.('제왕운기' '동명왕편' 등)

실제로 부족국가였던 부여국에선 부족장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된 왕이 큰 한해나 수해가 일어나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화시대의 이런 권력현실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통해, 합리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역사시대에까지 유전된 것 같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조까지 천재가 일어나면 왕은 이를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도살을 금하고, 시장을 닫아 오직 생필품만 거래케 하고, 활쏘기 같은 놀이를 하지 않는 등 자숙의 제스처를 보여줬다. 천재로 인한 민심이반의 가능성을 제도화된 근신책으로 제어하려 했던 것이다.

태풍의 강도와 진로를 과학적으로 예측하는 게 가능해진 현대에서 천재지변을 집권자의 행태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지난 여름 프랑스에서 폭염으로 수천명의 노인이 죽어갈 때에도 그 나라의 대통령은 끄떡없이 장기간 휴가여행을 즐겼다.

노무현 대통령이 태풍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시간대에 국악 뮤지컬을 관람했다고 세상이 시끄럽다. 침묵하던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했다. 국민은 이제 정서적 반감을 삭였으면 좋겠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