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먼지를 털어야지 사람을 터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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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호 33면

강홍준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강홍준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신성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퇴진 직전까지 내몰린 단초는 지난 11월 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감사였다. 당시 과기정통부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 대한 감사를 벌이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DGIST의 전임 총장이었던 신 총장의 비위사실을 적발했다고 한다. 신 총장이 DGIST 총장 재직 시절 공동연구 파트너였던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에 부당한 돈을 송금하고 제자를 편법지원했다는 게 과기정통부가 밝힌 그의 비위 사실이다. 과기정통부는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검에 신성철 KAIST총장을 국가연구비 횡령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이와 별건으로 지난 8월부터 DGIST에 대한 감사를 벌여 신 총장에 뒤이은 손상혁 DGIST 총장의 비위 사실을 적발했다. 손 총장은 지난 11월 말 사표를 던졌다. DGIST의 한 관계자는 “손 전 총장은 이사회에서 3개월 감봉 결정이 나왔다. 그런데도 스스로 총장직에서 사임했다”고 말했다.

작년 말부터 과학술계 기관장 #감사 → 비위 통보 → 퇴진 수순 #묻지마 옷 벗기기 광풍 멈춰야

스스로 나가느냐, 아니면 끌려 나가느냐. 정권 교체 이후 지난해말부터 과학기술분야 특수법인 대학 총장과 국책연구원 원장 등 기관장들은 둘 중 하나의  경로를 밟았다. 비리가 있으면 그에 걸맞는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감사·비위 통보·퇴진’이라는 사이클이 지난해말부터 과학기술계에서 공식처럼 굳어졌다. 중도 사임 직전까지 강도 높은 감사를 당한 사람도 여럿이다.

KAIST 이사회가 15일 신 총장에 대한 과기정통부의 직무정지 요청 안건을 유보하면서 신 총장의 퇴진은 당장 실현되지 않았다. 신 총장 본인도 적극적으로 부당함을 항변한데다 과학기술계 인사들도 반대 서명에 동참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은 스스로 걸어나가는 길을 택했다.

자진 사퇴한 기관장 11명 중 한 명인 A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스스로’란 표면 밑에 숨겨진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A원장 말에 따르면 과기정통부 고위직 한 사람이 먼저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나가달라고. 이유를 묻자 “다 아시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뭘 잘 못했길래 나가야 하느냐며 처음엔 버텼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고위직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나가달라고 했다. 누구의 요구냐고 묻자 “다 아시면서…. 묻지 마세요”라는 답변을 들었다. 여러 루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이라는 게 문제라는 거였다. 그런데 얼마 후 기관에 대한 과기정통부의 감사 통보가 왔고, 감사팀이 들이닥쳤다.

“내 고집 때문에, 아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자리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기관 전체가 힘들어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버틸 힘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요. 나갈 테니 감사 그만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감사 책임자가 ‘기관에 대한 감사 결과를 공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그냥 무너졌어요.”

A원장의 말을 듣는 동안 내내 좌절감과 모멸감이 뒤섞인 얼굴을 지켜봤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의 인생과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기술계 기관장이 무슨 정치성을 띠는 자리라고 이럴까. 오히려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실적과 행정 경험이 필요한 자리가 아닌가. 평생 쌓아온 학문적 명성을 바탕으로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자리여야 맞지 않나.

그렇다면 비위를 캐는 목적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먼지를 털고 적폐를 드러내 이를 개선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탈탈 털어 물러나게 하고 새사람을 세우자는 것인가. 과기정통부는 박근혜 정부 때 문화체육관광부가 가던 길을 걷지 말길 바란다. 감사로 찍어누르고, 자리에서 끌어내는 행위는 블랙리스트 만들어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행위보다 질이 더 안 좋다.

강홍준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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