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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지막 달동네 주민들 '박원순식 재개발'에 뿔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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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서울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 재개발 국제설계공모전 당선작. 주민들이 당선작을 거부하며 재개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사진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서울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노원구 '백사마을' 재개발 국제설계공모전 당선작. 주민들이 당선작을 거부하며 재개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사진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서울시의 첫 주거지 보존 재개발 사업이 주민 반대에 부닥쳐 표류하고 있다. 대상지는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중계본동 재개발구역),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백사마을'이다. 지난 7일 백사마을 주민 100여 명은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앞에서 “건축가 횡포에 사업이 중단됐다”며 설계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 #첫 주거지 보존 재개발 추진 #국제공모전 설계안 논란 #주민들 층수 반발해 당선작 거부

백사마을 재개발 사업시행자인 SH공사는 지난 6월 ‘중계본동 주택재개발정비구역 공동주택 국제지명설계 공모’의 당선작을 발표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앞장서서 당선자와 계약 해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주민대표회의 측은 조만간 열리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소위원회에 당선작이 아닌 다른 설계안을 상정시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공공이 주관한 국제설계공모전의 당선작이 보이콧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서울 중계동 백사마을 [중앙포토]

서울 중계동 백사마을 [중앙포토]

이번 국제 지명설계 공모전은 아파트 재개발 지역 첫 사례다. 공모전이 열린 데는 서울시의 의지가 컸다. 백사마을은 서울시가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새로운 주거지 정비 사업지다.

낡은 주택을 전면 철거하고 아파트를 신축하는 기존 방식 대신 마을의 지형과 골목길을 보존하며 개발하는 실험이었다. 이른바 ‘박원순식 재개발’ ‘박원순 표 도시재생’이라고 알려졌다.

사업은 지난해 SH공사가 사업 시행자로 선정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개발 기대감에 재개발 지분 거래도 크게 늘었다. 인근 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투자수요가 많은 소형 평수 땅 지분의 경우 물량이 동났을 정도”라고 전했다.

SH공사는 1~3층짜리 임대주택(698가구)을 짓는 주거지보존지역과 일반 분양 아파트 지역(2000가구)으로 나눠 진행하기로 했다. 서울시가 땅을 매입해 추진하는 주거지보존지역은 기존 땅과 골목길을 그대로 유지한다. 백사마을에 사는 세입자들이 재개발 이후 임대주택에 그대로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게 목표다.

해외 건축가 두 팀과 국내 건축가 네 팀을 지명 초청해 공모전을 진행했다. 공모전의 지침서에는 ‘길과 집터의 기억 보존’을 주요 가치로 내세웠다. 백사마을의 옛 모습을 살린 주거지보존지역과 일반 분양 아파트가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6개 안 중 5개 안이 구릉지를 따라 저층형 공동주택을 배치하는 설계안을 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된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의 ‘구릉지 풍경’도 마찬가지다. 최고 높이 25층 규모의 용적률(사업부지 대비 지상건축연면적 비율) 200%로 설계했으나 저층 단지가 많다 보니 평균 높이가 8층 정도가 됐다.

백사마을 국제설계공모전 당선작 투시도. [사진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백사마을 국제설계공모전 당선작 투시도. [사진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주민들은 층수에 반발하고 있다. 황진숙 주민대표회의 위원장은 “2000가구 아파트의 3분의 2를 5층짜리 저층으로 짓는 안을 주민들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인동 간격이 좁아 사생활을 침해받고, 북사면에 위치한 건물의 저층에 빛이 안 들어올 우려도 있는 만큼 사업성이 떨어지는 당선작 말고, 평균 높이 16층으로 아파트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조남호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고층으로 올릴 경우 인동 간격이 넓어지고 그에 따라 구릉지 아래 암반을 파야 해서 사업비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불통'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백사마을은 2008년 그린벨트가 해제되면서 이듬해부터 재개발이 추진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시행자로 나섰다가 지금과 같은 용적률과 개발 방식으론 사업성이 없다며 2016년 포기했다. 이 때문에 공공의 사업 진행에 대한 주민 불신이 크다.

황진숙 위원장은 “주민들이 설계 용역비 67억원 등 공모전 관련 비용 70억원가량을 부담하는데 정작 주민들은 사업에서 배제돼 공모전 지침 내용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관계자도 “주민 의사를 들어 조정안을 만들 의사가 있는데도 현재 논의하고 소통할 수 있는 협의체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백사 마을의 한 주민은 “SH공사가 조합 방식의 일반 재개발 사업에서 정보 공유를 위해 쓰는 ‘클린 업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며 “주민대표회의가 사업의 진행 상황과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 오해가 발생한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시작한 보존형 재개발이 성공하려면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국장은 “서울시가 처음 시도하는 주거지 보존 사업 관련 미래상을 좀 더 주민과 공유하며 세밀하게 사업을 진행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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