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이 흔들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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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어이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재야투쟁세력의 대부라 불리던 문익환씨가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부둥켜안고」 민족의 미래문제를 의논해보겠다고 평양으로 갔다. 가서 한국을 가리켜「독재세력과 군사 세력, 그리고 외세에 억압당하는 남쪽」이라 칭하였고, 장준하씨가 말했다는「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노래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닌 것처럼, 이른바 미제와 군사파쇼집단의 식민지적 억압지배지역으로 비웃음을 당한 셈이다. 통일은 「목숨보다 소중」하며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언제 벗어버려도 좋을 껍데기처럼 취급당했다.
실은 놀랄 일도 아니다. 이미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가 이상스런 기류에 휩싸여 왔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해야 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려면, 때로 「반통일」 세력이요, 「반공이데올로기」의 노예며, 「극우반동」이라는 고약한 비난을 당할 각오도 가져야 했다.
며칠 전 텔fp비전 심야토론에 나가서 학생운동권이 급진좌경세력, 심지어는 김일성 주체사상파에 의해 끌려다니는 경향을 경고하면서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였더니, 한 「민주」 교수가 대놓고 하는 말이 「마치 공안검사 같다」는 것이었다. 5공화국 치하에서 시국사건들의 변호를 맡아 고문과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개탄하면서 이러다가는 자유민주체제의 정당성이 뿌리부터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더니 공안당국으로부터 「반체제」 변호사취급을 당했는데, 허허 이제는 「민주」자 내세우고 「민족」자 독점하려드는 세력이 무슨 신종 공안세력처럼 행세하려드는 형국이 되었다.
편을 가르고 남 매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통 일 세력과 반통일 세력으로 나누기 시작하니 식자깨나 한다는 사람들일수록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인물로 낙인찍히지나않을까 눈치들을 보고 있다.
그래서 북방문제 좋아하는 여당국회의원이 어떤 세미나에서 「반공이데올로기 탈피」를 외치고 민주화와 통일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면서 통일방안이 마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어중간한 혼합적 중간형태에 있는 양 얼버무리는 현상마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반공이라는 소극개념이 우리의 국시는 아니었거니와 이데올로기는 더욱 아니다. 우리가 반공하는 것, 즉 공산주의를 믿지 않는 것은 북한공산집단 치하에서 겪었던 지긋지긋한 전체주의적 억압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요, 세계 공산국가들이 보이는 황폐와 비능률을 통한 새삼스런 확인이다. 우리가 믿는 신념체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민족적 기본질서에 있고, 민주화란 바로 이를 지키고 확충해나가는 것이요, 이를 훼손하고 희생시키고자하는 노력이 바로 반민주임을 안다.
그러므로 통일이 안되는한 민주화는 안된다든가, 통일 없는 민주화는 없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우리의 계속되는 염원이되 공산화통일이나 김일성 주체사상하의 전체주의통일은 오로지 민족전체에 환난만을 가져올 뿐이므로 이러한 비극을 막기위해서라면 희생과 부담마저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믿는다. 비록 대한민국이 남한에만 수립되었을 뿐이고 그간에 숱한 굴절과 정치적 독재, 그리고 사회적 불의를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하여온 이념체제가 인류의 지혜에 합당하므로 근본적 정통성과 정당성이 있는 나라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국가주권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체제를 수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는 그간의 억압적 정권이 정권안보를 위하여 민간의 통일 논의를 불법화하고 통일문제를 독점해왔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자 이제는 통일 논의와 민간교류를 허용하되 다만 대북창구는 정부로 단일화한다고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개념상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통일논의의 문제는 표현의 자유권의 영역으로 당연히 보장되었어야 했고 반면 대북교류와 통일정책의 추진은 무슨 교섭 「창구」같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국가주권, 즉 영민고권과 영토고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헌법의 사회주의 내지「집단주의」국가체제는 하나의 실재요, 이른바 「남조선해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국가주권에 대한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준적국적 성격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다. 남북이 어떻게 화해하여 통일을 이루어낼 것인가는 이와 별개의 문제다.
그러므로 민간차원의 대북교류가 순전히 비정치적 의미를 가질 때는 국가주권을 해하는 행위가 아니겠으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할 때는 당연히 국가주권과 상충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가주권의 행사주체로서 국민의 모든 대북접촉에 대하여 사전 사후에 걸쳐 그 성격을 심사하고 필요한 통제를 가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물론 법률로 기준을 정하고 혹은 생략하거나 혹은 간략화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문익환씨가 정부 모르게 북한으로 가서 「존경하는 김일성주석」을 만나 남한 4천만 민중을 의식하며 민족의 미래문제를 상론하는 것은 명백히 대한민국의 국가주권을 부정하는 행위로서 현행 국가보안법의 여러가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 정주영씨의 북한방문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과 국가보안법이 악법개폐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정주영씨의 방북에 대하여 정부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대통령의 통치권행사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통치행위를 어떤 초법규적 행위로 보려는 발상이라면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제1조의 목적규정에서 명시된바와 같이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것인 만큼 방북이 정부의 심사와 승인아래 이루어진 이상 결코 국가주권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아니므로 북한으로의 「탈출·잠입」이라는 범죄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해석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승인하의 모든 민간교류를 그때마다 대통령의 통치권행사로 보아야 하는 논리억지가 생긴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에 대한논란의 문제다. 이 법률은 구성요건이 애매모호하여 그간 많은 오용과 남용이 있었으므로 개폐됨이 마땅하다. 다만 그 개폐논의가 있어 서독기본법 제18조가 명시하는 바와 같이 「기본권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의 방편으로 오용할 때에는 기본권이 상실된다」는 헌법원리를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북한정치집단은 동독과도 달리 대남적화 전략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으며, 이른바 민족민주운동권 중에 폭력적 변혁투쟁을 전개하고자하는 세력도 엄존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과제는 오히려 어떻게 기본권의 존중과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내느냐에 있을 것이다.
통일의 길로 다가갈수록 우리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체제에 대한 신념의 정신과 역사의식을 다져두지 않으면 안된다. 권위주의적 억압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국가주권의 정당한 권위를 세워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더이상 눈치와 영합으로 「남이 해주겠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 신념과 담대한 용기를 잃어 우리 삶의 터전이 기어이 난파될까 심히 두렵다.
김상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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