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기업 경영,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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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호 33면

김창우 경제 에디터

김창우 경제 에디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다.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전사자만 1000만명에 달하는 비극이었다. 개전 당시만 해도 전쟁이 이렇게 길어지고 참혹한 결과를 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프랑스·독일의 정치가들과 군인들은 전쟁이 길어야 3개월이면 끝나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의 단기 결전 전략(슐리펜 계획)이 프랑스 마른에서 저지되면서 4년간의 참호전이 시작됐다.

변화 외면한 1차대전의 장군들 #기관총 앞으로 돌격명령 내려 #새로운 시대 맞은 한국 경영인 #과거 성공 방정식서 벗어날 때

역사상 최악의 대량살상무기라고 불리는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웠다. 정연한 대오와 강건한 의지가 승리를 가져온다는 머스킷 시대의 상식은 더는 통하지 않았다. 사정거리가 짧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머스킷 소총을 주로 썼던 19세기 후반까지의 전쟁에서는 서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50m 거리까지 접근해 일제사격을 주고받는 것이 통례였다. 옆의 전우가 총탄에 쓰러져도 전열을 흩뜨리지 않는 것이 승리의 열쇠였다. 붉은 코트를 입고 2열 횡대로 적군을 압박하는(씬 레드 라인) 영국군이나 푸른 코트에 붉은 모자와 바지를 입은 프랑스군이 정예로 평가받았던 이유다.

하지만 기관총이 역사를 바꿨다.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입고 철조망을 넘어오는 보병들은 참호에 은폐된 기관총의 좋은 먹이였을 뿐이다. 공격 의지가 참호 선을 뚫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프랑스군의 경우 1차대전 전체 전사자 140만명 중 60만명이 개전 6개월 만에 발생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존 엘리스 교수(군사학)는 저서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에서 “군 지휘부와 고위 장교들의 ‘돌격 앞으로’ 전술은 100년 전이라면 타당했겠지만 (1차 대전에서는)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인사철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속속 새로운 최고경영진의 면면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달 형제와 친족들에게 9000억원어치의 지분을 나눠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인사를 통해 세대교체에 나섰다. SK하이닉스의 이석희 사장을 비롯해 4명의 50대 최고경영자(CEO)가 나왔고 신임 임원들의 평균나이는 48세로 젊어졌다. 삼성그룹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안정’과 ‘성과 보상’을 기조로 인사를 했다. 핵심 사업부문장을 유임하고 큰 성과를 내는 반도체 부문을 이끄는 김기남 DS부문장을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 발령한 것이다. 지난 6월 40세의 나이로 LG그룹 총수가 된 구광모 회장은 첫 정기 인사에서 ‘안정 속 변화’를 택했다. 부회장 대부분을 유임시키는 한편 외부인사 영입 등으로 배터리·전장 등 신사업 부문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구 회장은 내년 시무식을 주재하며 ‘뉴 LG’ 비전을 선포할 예정이다.

변화의 시대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앞세운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가운데 고령화, 주 52시간제의 ‘내우’에 미중 무역전쟁, 글로벌 경기 침체 등의 ‘외환’이 겹쳐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 한국 기업의 최고경영진들은 안개 속을 헤치고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1차대전 당시 대부분 귀족 출신이던 많은 장교가 돌격 명령에 병사들을 이끌고 앞장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귀족 가문의 대가 끊겨 민주주의가 앞당겨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수많은 인명을 손실한 오판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너에 대한 충성, 하면 된다는 돌격 정신, 일사불란한 기업 문화, 야근과 주말 근무의 연속인 긴 근무시간. 이런 과거의 성공 방정식으로는 변화의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새로운 기업 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경영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김창우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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