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 전통도 모두의 문화 자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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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전국 38개 종가의 맏며느리 60여 명이 9일 오후 서울 창덕궁 연경당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국 각지의 명문 종가 맏며느리들이 한데 모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동연 기자

"제사도 제사지만 집안의 어른으로 행동거지를 항상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정말 힘들게 살아온 셈이죠. 그래도 우리의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딸 넷도 모두 잘 출가시켰고요."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 이이(1536~84.덕수 이씨) 종가(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의 15대 맏며느리인 서경옥(62)씨가 환하게 웃었다. 올해로 결혼생활 32년. 지금도 1년에 열 번의 제사(명절 제외)를 지낸다. 산더미 같은 집안일도 이제 몸에 익어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조선 중기 학자인 고봉 기대승(1527~72) 종가의 16대 맏며느리인 김길자(62)씨도 "집안의 법도에 따라 다스리고 화목하게 살았더니 아이들도 잘 따라주었다"고 즐거워했다. 김씨 역시 1년에 11번의 4대 봉사(奉祀.4대 조상까지 올리는 제사)를 35년째 지켜오고 있다.

김씨는 '신세대' 맏며느리(17대) 최정화(31)씨와 자리를 함께했다. 최씨는 "시어머니는 광주에 사시고, 저는 서울에 살림을 차려 명절 제사에만 내려가는 형편"이라며 "맏며느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수줍어했다.

9일 정오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 마당에서 매우 색다른 모임이 열렸다. 전국 38개 종갓집의 맏며느리 65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문화재청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우리 시대의 큰어머니'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전국 종가의 맏며느리들이 모인 건 전례가 없던 일이다. 우리 고유의 고택.사당 등을 지켜오고 옛 생활풍속도 유지해 온 종갓집 '안주인'에 대한 '보은' 행사였다. 또 종갓집 유지.운영과 관련된 애로점을 듣고 문화재 정책의 개선점을 찾아보려는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서애 유성룡(1542~1607).학봉 김성일(1538~93).점필재 김종직(1431~92).고산 윤선도(1587~1671).익제 이제현(1287~1367).오리 이원익(1547~1634).사계 김장생(1548~1631).갈암 이현일(1627~1704).심산 김창숙(1879~1962) 등 명문 종갓집 맏며느리들이 참석했다. 경북.전남.충북.경기.서울 등 전국 곳곳의 '큰어머니'들이 일종의 동료의식을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윤선도 종가의 19대 맏며느리인 한경난(43)씨는 "옛날 종갓집 맏며느리는 '하늘이 내려주신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나 요즘에는 그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며 "종갓집 며느리들이 '천연기념물'이 되지 않도록 당국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문화재 정책에 대한 불만도 터뜨렸다. 이원익 종가의 종부 함금자(67)씨는 "현재 규정에 따르면 기왓장 하나 수리하는 데도 1년 이상이 걸린다"며 "행정절차의 간소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선산 유씨 문절공 유희춘 종가의 노혜남(77)씨는 "고택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전기료도 만만찮다"며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 문화재를 지켜오신 종부님들에게 감사한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번에 지적된 문제점을 반드시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은진 송씨 송길준 종가의 김정순(72)씨가 "굴뚝이 무너졌는데도 수리를 못하고 있다"고 하자 유 청장은 즉석에서 "당장 조치하겠다"고 답해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날 오후 공식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으로 자리를 옮겨 연경당.낙선재 등을 참관하고 '제2의 만남'을 기약했다. "이런 자리가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종가의 전통이란 사실 저희 문중의 것만이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 지켜나갈 소중한 문화재요,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줄 보물입니다."(이이 종가 서경옥씨)

박정호 기자<jhlogos@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 종가 맏며느리란=종가는 조선 초기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하면서 생긴 개념이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은 집안을 주로 가리킨다. 종가 맏며느리의 가장 큰일은 제사. 시부모부터 고조까지 4대 조상을 기리는 4대 봉사(奉祀)가 기본이다. 1년 평균 여덟 번(부부별로 모심)이다. 철마다 지내는 시제(時祭)를 합하면 1년 평균 수십 번의 제사를 준비해야 한다. 종가 맏며느리는 '문중의 어른'으로 품격을 지켜야 한다. 자기감정 절제가 미덕으로 여겨졌다. 한배달우리차문화원 이연자 원장은 "고택을 지키며 옛 풍속를 잇는 종가는 현재 100여 곳에 이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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