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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월드컵서 멋진 골을 넣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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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를 가로막은 벽, 그것이 나의 문이었다."

35년 전 식모살이도 마다않겠다며 단돈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모진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마침내 8일(한국시간 9일) 하버드대 졸업식장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서진규(58.여)씨가 한 말이다.

서씨는 지금은 부산시에 편입된 경남 동래 인근의 '월내'라는 한 작은 어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먹고살기 힘든데, 입만 하나 더 늘려 놓았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다. 아버지는 엿장수였고 어머니는 술장수였다. 훗날 철도 노무자가 된 아버지를 따라가 충북 제천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녀는 고등학교만은 서울 가서 다니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먹었지만 살기도 벅차 어머니가 선술집을 내야 했던 집안 형편에서 보면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로막은 벽을 뚫어 문으로 만들듯 기어코 서울로 갔다. 친척집에 기거하며 잡지를 팔고 가정교사를 하는 등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정작 고교 졸업 뒤엔 대학에 진학할 형편도 못 되었고, 마땅히 취직할 곳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사촌언니의 권유로 가발공장에 들어갔다. 그 후 골프장 식당 종업원.여행사 직원 등을 전전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다. 사방이 막혀 있었다.

결국 서씨는 다시 벽을 뚫어 문을 열 각오로 1971년 23세의 나이에 식모살이라도 하겠다며 미국행을 감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식모 대신 식당의 웨이트리스가 됐다. 처음엔 뉴욕의 유대인 식당에서, 나중엔 '아리랑'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일했다. 그녀는 식당에서 번 돈으로 퀸스대에서 어학 공부를 한 뒤, 버루크대에 정식으로 등록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길은 신작로처럼 곧게 뻗지도, 평탄치도 않았다.

그녀는 미국에 온 합기도 사범과 결혼했지만 그에겐 숨겨 놓은 자식이 있었다. 툭하면 아내에게 매질도 마다않았다. 결국 대학도 더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또다시 벽이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군 입대였다. 훈련은 고됐지만 결국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포트 잭슨에서 보급 주특기 훈련을 마친 뒤 일등병이 되었다. 첫 군생활은 공교롭게도 한국 땅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80년 가을, 32세의 서씨는 미국 조지아주 포트배닝의 간부후보생 학교에 입교, 최고령 후보생임에도 일등상과 최우수리더상을 받으며 마침내 미 육군의 장교가 되었다.

82년 중위 계급장을 달고 주한 미군사령부의 유류담당 참모가 된 서씨는 중단했던 대학 공부를 용산에 있는 메릴랜드대 분교 야간대학에서 다시 시작해 서른아홉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14년 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5개 대학을 옮겨다닌 끝에 따낸 눈물겨운 학위였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90년 그녀는 사람들이 꿈꾸는 최고의 대학, 하버드의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독하게 공부했고 2년 만에 석사학위를 따냈다. 그리고 내친걸음에 단 두 명에게만 문을 열어준 박사과정의 정식 학생이 됐다. 군에 복귀한 서씨는 9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진급 대신 학업을 택한 그녀는 곧바로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복학했다. 그리고 10년 공부 끝에 기어이 하버드대 박사가 되었다.

서씨가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받던 그 시간 즈음,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월드컵도 열렸다. 축구는 인생을 닮았다. 골키퍼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바로 거기에 골문이 있듯, 인생에서도 자기 삶을 가로막은 벽들이 곧 내가 뚫고 가야 할 문이다. 그러니 자기 운명에 맞서자. 삶을 질식시킬 듯 가로막은 벽들을 뚫어 문으로 만들자. 그리고 내 인생의 월드컵에서 골네트를 가르는 멋진 골을 넣어 보자. 그래서 나도 희망의 증거가 되어 보자. 서진규씨처럼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