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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 기득권도 막지 못한 핵확산 역사…북한 비핵화는 가능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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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실험

원자폭탄 실험

제2차 대전을 맺은 결정타가 되면서 핵폭탄은 모두가 원하는 필살기가 되었다. 이 초유의 무기를 자신들만 갖고 싶어 했던 미국은 비밀을 유지하려 들었지만, 실전까지 투입되었기에 이미 많은 부분이 알음알음 알려진 상태였다. 카피캣이라는 말처럼 후발 주자들은 미국이 겪은 시행착오를 교과서 삼아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과 비용을 투입해서 핵폭탄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미국 핵 쓰자 후발주자도 확보 나서 #프, 미·소 힘에 눌리자 핵 공개 개발 #소련 협박해도 핵무기 개발 안바꿔 #핵무기 완성한 뒤 포기는 어려워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이들의 자발적 도움과 간첩 덕분에 소련이 1949년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유일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미국의 희망은 불과 4년 만에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렇게 핵에 의한 균형과 공포로 대변되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보유국이 된 소련도 핵폭탄이 미국과 자신들만이 운용하는 무기가 되기를 원했다. 패권을 위해 또 다른 경쟁자가 있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미국처럼 착각이었다.

소련 최초의 핵폭탄인 RDS-1은 나가사키에 투하 된‘뚱보(Fat man)’의 카피 판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닮았다. 사실 스파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은 많은 기술이 제작에 사용되었다. [사진 wikipedia]

소련 최초의 핵폭탄인 RDS-1은 나가사키에 투하 된‘뚱보(Fat man)’의 카피 판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닮았다. 사실 스파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은 많은 기술이 제작에 사용되었다. [사진 wikipedia]

맨해튼 계획 당시 많은 역할을 담당한 영국은 전후에 미국의 도움으로 자신들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1946년 발효한 핵물질 및 기술의 해외 이전을 금지한 맥마흔 법에 따라 미국은 지원을 거부하고 대신 핵우산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비록 전쟁 중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전통의 강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에 미국의 태도 돌변은 참을 수 없는 모멸이었다.

분노한 영국이 비밀리에 독자 개발을 나서자 미국과 소련이 이를 막기는 불가능했다. 이미 많은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1952년에 영국은 세 번째로 핵클럽이 되는 데 성공했다. 반면 프랑스는 공개적으로 개발에 나섰다. 실패할 경우의 부담과 외부로부터 방해 때문에 적어도 개발 과정만큼은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1956년 10월 발발한 제2차 중동전쟁의 결과가 프랑스의 태도를 바꾸었다.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었던 핵탄두 탑재 중거리탄도탄인 RSD-10. 소련 해체 후 보유한 1,700여발의 핵탄두를 1994년 러시아로 이전시키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비보유국이 되었다. [사진 wikipedia]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었던 핵탄두 탑재 중거리탄도탄인 RSD-10. 소련 해체 후 보유한 1,700여발의 핵탄두를 1994년 러시아로 이전시키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비보유국이 되었다. [사진 wikipedia]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는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하며 제2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집트의 후원 자처하고 나선 소련이 즉시 철군하지 않으면 파리와 런던을 핵무기로 공격하겠다고 협박했다. 여기에 사태 확산을 바라지 않던 미국도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그해 12월 프랑스와 영국은 철수했다. 핵폭탄이 없어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1945년부터 비밀리에 진행하던 연구를 공개로 전환하고 본격 개발에 들어갔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레가누에서 실시한 프랑스 최초의 핵실험. 선전 효과를 노려 프랑스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핵폭탄을 개발한 나라다. [사진 AFP]

프랑스령 알제리의 레가누에서 실시한 프랑스 최초의 핵실험. 선전 효과를 노려 프랑스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핵폭탄을 개발한 나라다. [사진 AFP]

당황한 미국과 소련은 프랑스의 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유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오히려 프랑스는 서독에 공동 개발을 제안하며 대응을 했다. 프랑스는 1960년 2월 핵실험에 성공했다. 만일 소련의 겁박이 있었을 때 미국이 강력히 대응했다면 프랑스의 핵무장을 막았을 가능성도 있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미국에 실망한 프랑스는 핵을 보유하자 1966년 전격적으로 나토를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공연히 미국의 핵 공격 검토 발언에 만감 했던 중국도 핵무기 열망이 대단했다. 1954년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핵무기 개발 의지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은 마치 미국이 영국에 그러했던 것처럼 핵우산을 제공하여 주겠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중소 이념분쟁에 따라 이런 관계마저 단절되자 중국은 독자 개발을 진행해 1964년 10월 16일 마침내 핵폭탄 보유국이 되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 아래)이 이동식발사대(TEL)에 실린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급 화성-15형을 살펴보고 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포기한 나라가 없다시피 하기에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우려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진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 아래)이 이동식발사대(TEL)에 실린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급 화성-15형을 살펴보고 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포기한 나라가 없다시피 하기에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우려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진 노동신문]

더는 확산이 곤란하다고 본 미국과 소련의 주도로 1969년 기존 5개국을 제외하고 핵무기의 개발과 보유를 금지한 NPT(핵무기비확산조약)가 성립되었다. 이들 모두 유엔 상임이사국이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조약 이행에 대한 의지가 대단히 강했지만, 현재 비공식 핵무기 보유국인 인도, 파키스탄과 보유가 확실하게 되는 이스라엘 그리고 국제적 이슈인 북한, 이란처럼 공포의 확산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핵무기 제재가 가해져도 보유 시 누리는 군사, 외교적 이점이 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련 해체 후 소련 연방 지역에 보유 핵무기를 국제 협약에 따라 러시아로 이전한 우크라이나 등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비핵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리비아처럼 개발 단계에서 좌절시키지 않으면 이미 완성된 핵폭탄을 포기하도록 만들기는 상당히 어렵다. 북한이 CVID(완전하게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에 따라 비핵화에 나서기를 원하지만, 전망이 우려스러운 것도 바로 이런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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