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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탄폐인' 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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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말 그 영화 그렇게 좋던가요?"

화제의 영화'가족의 탄생'을 뒤늦게 관람했던 기자에게 후배가 그렇게 슬쩍 되물어왔다. "대단한 영화"라며 몇 날을 거품 물자 핀잔을 준 것이다. 하지만 "상반기 한국영화 중 최고"라는 고급정보를 먼저 귀띔해준 것이 그였다. 고두심.문소리.공효진의 발군의 연기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열린 가족'의 엽기 스토리까지….

영화는 몇 년 동안 집을 나갔던 남동생(엄태웅)이 왠지'흐릿한 동거녀'고두심을 달고 누님(문소리) 집에 들어오며 시작된다. 올케 고두심과 시누이 문소리는 무려 스무 살 차이. 그 어색한 한 지붕 생활에 꼬마까지 합류한다. 고두심 전 남편의 전 부인이 낳은 딸. 영화는 이들 사이의 가슴 뻐근하면서도 유쾌.상쾌.통쾌한 사랑이 잘 짜인 내러티브 안에 녹아들어 있다.

"우와, 그 영화 장기상영되는 것 알아? '가탄폐인'들이 생난리래. 영화관 몇 곳도 6월 동안 관객을 받기로 했고."

며칠 뒤 후배를 찾아 또 흥분했다. 어느 새'가탄폐인'이 다 된 셈인데, 그건 썩 괜찮은 문화체험이었다. '폐인문화'소속감을 처음 느껴봤으니까. 폐인문화란 최근 풍속이다. 예전 문학.미술에 대한 고전적인 감상이 골방 속의 나 홀로 경험이라면, 이제는 집단 공유 쪽이다. 일테면 TV드라마 작가 노희경은'노희경 폐인'을 몰고 다니지만 영화야말로 폐인문화 1번지다.

대중적 흥행과는 상관이 없지만, 높은 충성도를 보이는 광팬들은 문화시장마저 바꿔놓는다. 2001년 '번지점프를 하다'가 그랬다. 지난해 영화'형사'도 '형사폐인'을 만들어내며 별도 감상회를 가졌고, 올해'달콤, 살벌한 연인'에 푹 빠진'달콤폐인'에 이어 등장한'가탄폐인'들은 상영 초기'미션 임파서블3'에 밀렸던 '가탄'의 장기상영이란 성공을 이끌어 냈다.

일본식 오타쿠와는 또 다른 폐인의 존재는 문화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가탄'은 그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영화의 넘치는 에너지를 멋지게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에도 한국영화는'이야기를 만드는'능력이 출중하다. 멜로.액션누아르.공포.드라마 등 전 장르에서 그렇다.

"최근 한 달 새 봤던 한국영화들이 모두 좋았어요. '달콤, 살벌한 연인'은 변칙의 드라마 구성에 뻑 갔고, '국경의 남쪽' '짝패' '구타 유발자들', 그리고 '가족의 탄생'모두가 할리우드 못잖아요. 괜찮다는 한국영화는 무조건 보는데, 그 다양한 스토리와 재미에 매번 놀라요."

며칠 전 카피라이터 최윤희씨가 털어놓은 고백이다. 젊은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영화관을 들락거려야 할 판인데, 눈 여겨볼 점은'내셔널 시네마(민족영화)'라는 딱지를 거부하는 한국영화의 특징이다. 즉 영화를 제법 만든다는 나라들은 특정 장르에서만 강하기 때문에 내셔널 시네마라는 딱지가 붙는다. 예전의 홍콩 누아르,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기억되는 이란 영화, 그리고 일본의 사무라이 액션….

그 정도가 지구촌 절대강자인 할리우드에 대적하는 주요 선수들의 명단이다. 그게 전부다. 반면 한국영화는 한국적 미학의 임권택, 사회성 짙은 이창동에서 '아시안 익스트림'의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천변만화의 얼굴이다. 여기에 봉준호.김기덕.홍상수 감독의 색깔까지를 염두에 둬보라.

작품이 주는 그 자체의 즐거움과 함께 한국영화의 위력을 확인했던 '가탄'관람은 실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누가 그랬던가? 기침과 걱정거리는 가슴에 담아둘 수 없다고…. 실은 즐거움이야말로 그렇다. 말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개운해졌다. 문제는 '가탄'의 그 재미난 스토리를 겨우 입만 뻥끗해본 점이다. 스토리를 줄줄이 꿰면 보는 즐거움이 반감된다. 당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입술을 깨문 기자를 이해해 달라.

조우석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