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스태그플레이션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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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FRB 의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글로벌 증시의 급락 흐름은 이날 국내 증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긴축, 경기 둔화 등 지겨울 정도로 회자된 재료들이 생각보다 길게 주식시장을 괴롭힐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스테그플레이션까지 거론되는 현재 상황에 대해 말이 지나치게 앞서가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 미국이 스테그플레이션? = 경기는 둔화되는데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속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 '스테그플레이션'이라고 일컫는다.

미국 경제가 실제로 이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걸까.

최근 지표에서 나타난 인플레이션 압력은 통계의 속임수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 외국계 증권사의 리서치 센터장은 미국의 근원물가 구성 항목에 주택 임대 비용이 3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매매 가격이 포함되지 않는 점에 주목했다.

"미국도 한국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 듯 합니다. 주택 매매 가격이 더 이상 오르지 않자 전세 수요가 늘어나면서 임대 가격이 오른거죠. 그런데 물가 지표에는 임대 비용만, 그것도 높은 비중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지표상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주택 매매 가격 상승세가 둔화되니까 부동산 경기가 둔화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임대 가격이 오르면서 근원물가 지표를 끌어올려 인플레이션 압력이 점차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이 센터장은 "근원물가에 주택 매매 가격의 상승 둔화가 반영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근원물가가 오르는 것은 후행적인 것"이라며 "이미 16차례의 금리인상과 추가 인상 가능성으로 주택 경기나 소비가 위축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 지표를 보자면 금리를 더 올려야 하는 상태"고 설명했다.

안승원 UBS 전무는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세균과 같은 것"이라며 "부지불식간에 퍼져 경기에 타격을 가한 뒤에야 지표로 드러나며, 실제로 16차례에 걸친 FRB의 금리인상에 따른 여파가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미국 경제를 스테그플레이션이라고 진단하기는 어렵다"며 "미국이 금리인상을 지속할 경우 한국은행도 인상에 나서면서 소비와 물가가 악화될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 말이 앞서 나간다 = 최근 고용이나 주택경기, 물가 등 지표가 전문가의 기대와 엇갈리는 흐름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스테그플레이션'까지 들먹이는 최근 움직임은 지나치다는 분석이다.

버냉키의 다듬어지지 않은 발언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시장 친화적인 기조로 자신만의 '효과'를 만들어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과 달리 버냉키의 발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쇼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

오현석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버냉키 의장에 대한 신뢰 결여가 글로벌 증시의 폭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미국의 경기가 우려할 만큼 냉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가도 통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 말이 너무 앞서가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이달 말 FOMC에서 금리인상이 확실시되는 한편 이후에도 추가 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국내외 지표를 보면 글로벌 경기가 부분적으로 둔화되는 움직임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과거 2 ̄3년 동안 FRB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고, 새로운 의장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한꺼번에 주가에 반영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전문가는 "금리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가 너무 낙관적이었다"며 "버냉키의 취임 초기 그가 시장친화적 인물이며 따라서 금리인상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지만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 주가 하락 지속된다 = 7일 장중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33.25포인트 내린 1268.37을 나타내고 있다. 지수는 1270마저 내준 채 연중 최저치를 경신했다.

1300이 무너졌을 때 1차 지지선으로 제시됐던 1280도 힘없이 무너지자 주가 하락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코스피지수가 1270 내외까지 밀렸지만 연간 실적 전망이 하향 조정된데 따라 시장 PER은 9배 중반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오현석 연구위원은 "국내 증시에 자체적인 완충제나 모멘텀이 부재하기 때문에 반등다운 반등 없이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며 "저점을 확인하기까지 상당한 고통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의 긴축 문제를 제외해도 선물옵션 만기와 금융통화위원회, 유로존의 통화정책 회의 등이 맞물려 있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는 얘기다.

해외 투자자들도 자산 버블을 우려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이어지면서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몸집을 줄일 것이라는 관측과 외국계 증권사로 어떤 종목을 먼저 팔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의가 이어진다는 얘기도 들린다.

윤세욱 메리츠증권 리서치 센터장은 "2004년 중국 발 쇼크 당시 4월말부터 8월초까지 3개월반 동안 장기간 조정을 겪었다"며 "심리적 지지선인 1300 이 붕괴됨에 따라 1200 대 초반까지 내려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주가 조정이 8 ̄9월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거래가 위축된 가운데 매수 부재로 주가가 폭락하고 있지만 수급 여건이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강현철 연구위원은 "외국인이 매도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공격적인 '팔자'로 보기는 힘들고, 기관의 손절매도 왠만큼 마무리되는 등 수급 흐름이 나쁘지 않다"며 "투신권에서는 매수 욕구가 있지만 추가 하락을 우려해 적극적인 '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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