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정치로 과학을 재단할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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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허정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허정원 과학&미래팀 기자

허정원 과학&미래팀 기자

“해방을 축하드린다고 하더라” 20일 사퇴한 하재주 전(前) 원자력연구원장은 이임사 막바지에 가족 얘기를 꺼냈다. 하 원장은 “아들이 와인을 한 병 사 들고 와서 ‘이제 자유롭게 사시라’고 축하를 건넸다”며 “위로가 많이 됐다.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말했다. 임기 3년 중 1년 8개월 만에 사임한 아버지의 이임식을 아들이 ‘해방’으로 표현한 이유는 뭘까.

해방은 구속이 있어야 성립한다. 장인순 원자력연 고문은 이임식 전날인 19일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구속’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이른바 ‘자진사퇴 압력’이 핵심이었다. 장 고문은 “지난 5월부터 정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통해 하 원장에게 사퇴 압력을 가했다”며 “하 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지난 6월 반핵단체 출신의 상임감사를 보내 연구과제를 지연시켰다”고 증언했다. 정부가 보냈다는 인사는 반핵부산시민대책위원회 사무처장 출신인 서토덕 상임감사다.

지난 20일 사퇴한 하재주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이임사를 읽고 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지난 20일 사퇴한 하재주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이임사를 읽고 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장 고문은 “연구과제는 시간이 생명”이라며 “하 원장도 결국 자신이 나가야 조직이 굴러간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혔다”고 설명했다. 이임사에서 하 원장은 “연구 성과로 승부를 내야 하는데, 이런 것으로 발목 잡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본인을 짓눌러 왔던 구속의 정체에 대해 암시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사퇴 압력설을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아무 문제도 해결된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문제는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원자력연이 공릉동 연구용 원자로를 해체하면서 저지른 방사선 오염 금속 무단 유출 및 폐기 사건 등이다. 앞뒤가 안 맞는 해명을 한 것이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본지 보도에 대해 해명 또는 설명자료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장 고문의 말대로, 하 원장의 사퇴에는 그가 전 정권에 임명된 인사라는 점과 ‘탈원전’이라는 이념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가 부임 직후부터 자진신고제를 도입하는 등 연구원의 과오에 대해 결자해지(結者解之)하려 한 전문가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 원장이 책임질 일이 있다면 공식 절차를 거쳐 발표하면 될 일이다. 그가 정치적 이유로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원자력연이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쳤다. 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자력기구 국장 등을 역임하며 전문성으로 원장이 됐듯, 과학은 오로지 전문성이 지배해야 한다. 과학에 대한 정치적 재단은 오히려 원자력을 더욱 위험한 에너지로 바꾼다.

허정원 과학&미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