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세 할머니, 교통지도 중 사망…노인 잡는 일자리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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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이 쉼 없이 오가는 광주광역시 북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가 스쿨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차량이 쉼 없이 오가는 광주광역시 북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가 스쿨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20일 오전 8시35분쯤 광주광역시 북구 모 초등학교 앞 도로. 학생들을 태우고 수학여행을 떠나려던 45인승 관광버스가 횡단보도 위 정모(76ㆍ여)씨를 치었다. 이 사고로 정씨가 숨졌다. 사고를 낸 버스 기사 이모(55)씨는 “편도 2차로의 도로변에서 출발하던 중 버스 바로 앞에 서 있던 정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령자 특성 고려 않고 노인 일자리 늘리기만 급급 #최근 5년간 노인 26명 일자리 사업 관련 목숨 잃어 #"위험ㆍ불필요한 일 아닌, 꼭 필요한 일거리 제공을"

여든을 바라보는 정씨는 사고 당시 교통지도를 하고 있었다. 정씨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지원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 중 하나인 ‘스쿨존 교통지도’ 참여자였다. 차량이 끊임없이 오가는 도로 위에서 등교 시간대 하루 3시간씩 일하고 받는 일당은 2만7000원. 시급으로 치면 9000원이었다. 그것도 한 달 최대 30시간까지만 일을 할 수 있어 월급은 27만원이었다.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노인들의 비극적인 사망이 잇따르고 있다. 노인들의 신체 특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정부가 일자리 수 늘리기에만 급급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채용 정보를 찾아보는 노인들(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채용 정보를 찾아보는 노인들(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중앙포토]

빠른 속도로 차량이 달리는 도로 위에서 스쿨존 교통지도를 하는 노인들 가운데는 정씨 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도 많다. 80대 중반의 노인들도 있다. 노인 일자리 사업 수행기관 관계자는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면 90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노인 일자리 사업은 보통 ‘65세 이상’ 기준만 충족하면 지원 가능하다. 연령 상한선은 없다. 수행기관 측은 면접을 통해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눈으로 확인한 뒤 노인들을 일자리 사업에 투입한다.

일부 노인 일자리 사업은 노인의 신체적 특성은 무시한 채 이뤄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주로 외부에서 활동하는 스쿨존 교통지도, 주ㆍ정차 계도, 생태·환경 개선 등이다. 이들 사업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지치고 더위와 추위에 취약한 데다가 위험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고령의 노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업무일 수 있다.

차량이 쉼 없이 오가는 광주광역시 북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가 스쿨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차량이 쉼 없이 오가는 광주광역시 북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가 스쿨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실제 노인들이 일자리 사업 활동 중 숨지는 사례도 반복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26명이 노인 일자리 사업과 관련해 숨졌다. 지난 6월 22일 경남 양산시 한 도로에서 승용차가 도로변에 있던 70대 노인 일자리 사업 참여자 3명을 덮쳐 모두 숨졌다. 이들은 마을의 쓰레기나 낙엽을 치우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휴식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인솔자는 없었다.

정부는 2004년 노인 일자리 사업을 처음 도입했다. 해마다 예산 규모와 일자리 수를 늘려가고 있다. 올해 사업 규모는 일자리 51만3000개, 예산 1조 2558억원(국비 6366억원, 지방비 6192억원)이다. 내년에도 1조 6000억여원을 들여 61만개 이상의 노인 일자리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자리 관련 노인 사망이 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러스트 김회룡]

일자리 관련 노인 사망이 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러스트 김회룡]

일자리 사업에 주로 참여하는 노인들은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 등 비교적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다.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용돈을 벌기 위해 낯선 일에 뛰어든다. 안전교육은 2시간만 이뤄진다.

그러나 노인 일자리 사업을 정부로부터 사실상 ‘할당’받는 지자체 등 수행기관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오히려 매년 사업량이 줄어들길 바라고 있다. 대상자들에 대한 교육 여건이 좋지 않은 데다가 관리 인력도 부족해 사고 위험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지자체 관계자는 “정부가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일자리 실적을 늘리기 위해 노인 일자리 사업에 집착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한 푼이라도 벌고 싶은 노인들에게 충분한 교육도 하지 않은 채 위험하거나 불필요한 일자리에 투입하는 것을 중단하고 노인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스쿨존 교통지도 등 일부 노인 일자리는 위험 요소가 있다는 지적 등이 있어 축소·폐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향후에는 노인 일자리의 양은 물론 질적 성장도 목표로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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