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운동 70돌 맞아 재조명|엄항섭 임정의 숨은 살림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일파 엄항섭은 임정의 살림꾼이었다.
상해임정이 중국대륙을 전전할 때 청사를 물색한다거나 요인들의 거처를 구하는 일은 대개 엄항섭의 몫이었다.
임정의 노인들이 변변한 차편조차 없어 우두망찰 거리에 서성거릴 때 차를 빼내거나 돈을 융통해 온 것도 주로 그였다.
그는 영어·프랑스어 등을 능란하게 구사해 프랑스 조 계 등지에서 많은 편의를 얻어냈다.
일파가 상해로 망명한 해는 보성 전문 상과를 졸업한 해인 1919년. 21세 홍안이었다
그는 이 젊음과 열정을 바쳐 그 자신의 독립운동과 임정 어른들의 뒷바라지에「즐겁게」 헌신했다.
엄항섭은 또 김구의「아이디어 맨」이었다.
상해임정의 조사원에서부터 해방 후 한독당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그는 끝까지 김구의 곁을 지켰다.
해방정국에서 김구의 이름으로 발표된 각종 성명서 가운데 한문 투의 것은 조완구가, 그 나머지는 대체로 엄항섭이 작성해 냈다.
32년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의 장거 뒤 이의 국내·외 홍보전략을 짜 각국으로부터 호응을 받아 낸 것도 그의 수확이었다.
22년 상해 절강 대학을 졸업한 엄항섭은 바로 임시의 정원 의원·임정 비서국원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4년 상해 청년동맹 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경제 후원회를 만들어 임정살림을 적극 지원하였다.
27년 29세의 청년 엄항섭은 이동령의 중매로 19세의 동포처녀 연미당과 짝을 맺는다.
연미당은 이후부터 김 구·이동령 등 임정수뇌들의 안 살림을 맡아 가흥·진강 등지를 떠돌며 귀국 때까지 봉사했다.
그녀는 또 광복진기 청년공작 대원·한인여자 청년 동맹대표·애국부인회 조직부장 등을 맡아 부군 못지 않게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그녀는 납북된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5자녀를 기르다 5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병석에서 23년간이나 시달리다 지난 81년 숨졌다.
엄항섭은 슬하에 2남4여를 두었는데 대륙을 떠 돈 임정의 파란이 어떠했는가를 이들의 출생지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장남 기동 씨와 장녀 기선 씨는 상해에서, 2남 기남씨는 남경에서, 2녀 기순 씨는 가흥, 3 녀 기주씨는 사천에서 각각 태어났고 막내 기원 씨는 해방 후 김구가 거처하던 경 교장에서 출생했던 것.
일파는 31년 한국 교민 단 의경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 혁명당의 재무를 담당했다.
이어 37년 한국 국민당 간부, 40년 한독당 집행위원, 41년 임시의정원 외무위원장, 44년 임정 선전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김구와 함께 귀국했다.
해방 후에는 김 구·조완구 등과 더불어 한독당 강경 주류를 이끌며 민족주의 노선에서 자주독립과 분단저지에 전력했다.
48년 김구를 수행,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49년 김구 서거 뒤엔 조완구와 함께 조락해 가는 한독당을 되살리려 애쓰다 6·25동란의 와중에서 납북돼 버렸다. 전정발발 3일 후에 장남 기동 씨도 실종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일부의 월북 설에 대해 장녀 기선 씨는『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고 전쟁직후 가족들을 모두 고향 여주로 피난시킨 걸로만 봐도 어떻게 월북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일파의 유족 중 기선씨(60)와 2남 기남씨(51)는 대전에서「루시 모자원」이라는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극빈 모자세대를 위한 직장 알선과 직업훈련 등을 하고 있으며 현재 21가구 80여명이 두 사람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기선 씨는 3·1 여성 동지 회 대전직할시경 충남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모임의 지역회장은 엄항섭과 생사를 같이 한 조완구의 2녀 규은씨가 맡고 있어 깊은 감회를 주기도 한다. <대전 이헌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