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도체 반격 … 미국보다 한국이 피해 더 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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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중 무역 갈등의 불씨가 반도체로 옮겨붙으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도 타격이 예상된다.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이 그간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반독점(가격 담합)이란 칼을 뽑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장비 수출 제재에 맞불 #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 조사 #반독점 관련 대량의 증거 확보 #“최대 8조 과징금, 한국 무대책”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에 따르면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 반독점국의 우전궈 국장은 지난 16일 ‘반독점법 시행 10주년’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3개 업체(삼성전자·마이크론·SK하이닉스)에 대한 반독점 조사를 통해 대량의 증거를 취득했고, 조사에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은 연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3개 업체에 대해 가격 담합 의혹을 제기했다. 공급 부족을 악용해 ‘끼워팔기’ 같은 위법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중국 스마트폰·PC 제조사들이 중국 경제정책 총괄부서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에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계속 오르는 데다 공급도 원활하지 않다’고 제소한 것이 계기다.

발개위는 지난 2월 삼성전자 등에 가격 인상 자제와 중국 기업에 대한 메모리 반도체 우선공급을 요구했다. 5월엔 반독점국이 3개 업체의 담당자 소환, 중국 현지 사무실 불시 방문 수색 같은 조사를 벌여 왔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중국 당국자의 이번 발언에 크게 두 가지 노림수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미국을 향한 경고다. 반도체는 중국과 미국 간 무역 갈등의 주요 쟁점 중 하나다.

연초 미국이 중국 IT업체인 화웨이·ZTE 등에 제재를 가하자 중국은 미국 반도체 업체인 퀄컴의 네덜란드 NXP 인수 승인 보류, 마이크론 등에 대한 반독점 조사 등으로 반격했다.

이어 7월 중국 푸저우 법원이 마이크론에 ‘중국 내 판매 금지’ 예비 명령(prelimi nary injunction)을 내렸다. 지난해 매출의 50% 이상을 중국에서 벌어들인 마이크론은 D램, 낸드플래시 관련 제품 26가지를 중국에서 판매하지 못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미국 상무부는 중국 푸젠진화반도체를 수출입 금지 명단에 올렸다. 내년 초 D램 양산을 앞둔 푸젠진화가 미국산 장비나 소프트웨어, 부품 등을 수입할 수 없게 되면 양산 시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중국이 반독점 카드를 꺼내들고 대응에 나섰다는 것이다. 2016년 ‘반도체 굴기(堀起)’를 선언한 중국은 현재 10%대인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내년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앞둔 포석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반독점 조사 대상인 3개 업체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개 업체의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은 60%, D램은 95%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중국의 초기 기술 수준은 당장 3개 업체와 경쟁할 수준은 아니지만 자국 업체 편들기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중국의 속내와 상관없이 국내 반도체 업계는 타격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도 반독점 적용 범위가 넓어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반독점으로 결론낼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반독점 조사는 3개 업체가 실제로 가격 담합을 했는지 여부뿐 아니라 경제외적 변수를 크게 반영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예컨대 대상 업체가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한 반면, 대상 업체의 반도체를 수입해 완성품을 만드는 자국 업체의 실적이 부진한 것을 연결시켜 혐의를 씌울 수 있다”고 말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 회장은 “중국이 억지를 부려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하면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는 만큼 투자 위축 등 충격이 의외로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인 만큼 미국과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언론들은 반독점으로 결론날 경우 3개 업체가 물어야 할 과징금이 최대 8조6000억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중국은 2015년 미국 퀄컴에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과징금 60억 위안(약 1조원)을 부과했다.

뾰족한 대응 방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중국이 본격적인 반독점 조사를 시작한 후 6월 산업통상자원부와 업계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했지만 당시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아직 중국은 3개 업체에 조사 결과 등을 통보하지 않았다.

반도체는 지난해 전체 수출의 17%를 차지할 만큼 한국 경제에서 중요한 산업이다. 특히 중국으로의 반도체 수출액은 전체의 39.5%에 달했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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