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원자는 전신·뇌성마비 이웃|바깥세상을 보여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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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차보다 더 빠른 전철도 생기고 20층, 30층짜리 건물도 빽빽이 들어섰다는데…제가 그런 구경을 다 할수 있게 되다니 이젠 여한이 없습니다.』
6·25전상이 재발돼 15년째 거동을 못하고 자리에 누운채 반 식물인간 생활을 해오다 25일 이웃의 도움으로 바깥 나들이에 나선 정흥모씨(59·서울 잠실 4동 시영아파트121동 301호)의 깊게 팬 주름살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혼자 힘으론 걸을 수 조차 없는 불구 이웃들에게 바깥 세상을 보여주자』는 이웃들의 「세상보여 주기운동」에 이날 정씨는 따라나섰다.
서울 송파구 주관으로 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3월 3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이 운동에 앞서 동료 상이군경 회원들과 가족들의 부축으로「예비적응 훈련」에 나선 정씨는 6·25전투가 한창 치열하던 52년 학도병으로 지원했다가 동부전선에서 척추를 다친 상이용사.
73년 척추변이 재발, 고개도 못 움직이는 전신마비로 번져 밥도 가족이 떠 넘겨 주고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때없이 찾아드는 고통을 진통제로 버텨내야 했지만 그 무엇보다 24시간 꼼짝못하고 15년째 누워 있는 것은 「무서운 형벌 」이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손으로 동화책을 읽거나 손거울을 돌러가며 꼼짝않는 고개를 대신해 방안을 비춰보기도 하지만 등창이 생기고 얼굴뼈가 내려 앉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할아버지」가 됐다.
지난해 여름 이웃 주민들이 들 것과 침상을 준비해 줘 6식구가 함께 사는 아파트 앞마당까지 나가본 것이「14년만의 첫 외출」이었다. 정씨의 꿈은 학창시절 즐겨 다니던 남산에 올라보는 것.
송파구 주민들이 정씨와 같은 불행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지난해 장애자 올림픽이 계기가 됐다. 해외동포도 아니고, 무인도에서 빠져 나온「로빈슨·크루소」도 아닌 도시의 섬 속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외롭고 쓸쓸히 살아가는 이웃들을 위해 주민들이 나섰다.
부녀회·자문위원들이 중심이 된 연말 불우 이웃돕기 방문에서「바깥세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부녀회의 건의를 받은 구청 측도 적극 지원에 나서 이달 8일부터 1주일동안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7년째 하반신 불수인 구기회씨(48),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로 여태까지 바깥 구경을 못한 백모군(18), 30년 전의 허리부상이 재발해 12년째 휠체어 신세를 지며 기타 치는 것이 유일한 낙인 상이용사 안민열씨(56).
추락사고·복막염·근육위축증·골수염·관절염·뇌막염·중풍….
원인은 달랐지만 어려운 이웃들은 너무나 많았다.
최종 집계결과 2천3백27명의 장애자 명단이 작성됐다. 그중 거동이 전혀 안 되는 중증장애자 48명은 따로 분류됐다.
30년 이상 누워지낸 사람이 13명, 10년 이상도 24명이었다. 48명중 월수입50만원 이상은 3명 뿐으로 절반이 넘는 26명은 2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는 2중고였다.
주민들과 구청 측은 세 차례 협의 끝에 매주1회씩 세상 보여주기 사업을 하되 3백명을 최종대상자로 뽑아 장기 격리자부터 우선적으로 실시키로 했다.
코스는 잠실 운동장·농수산물시장·올림픽 공원 등 관내는 물론 남산·국회의사당·남한산성까지 당일코스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골고루 볼 수 있게 했다.
특히 병세 악화와 안전에 주의해야하기 때문에 1회에 2명씩만 정해 장애자 1명당 의료진·보호자 4∼5명씩 동승키로 했고 앰뷸런스와 봉고 차는 구청에서 제공하고 인력봉사는 주민들이「당번제」로 맡기로 했다.
7백명의 이 지역 부녀회원들이 우선 봉사를 맡으려했으나 자원봉사 신청이 잇따랐다. 개인택시 기사회가『부축하는 것은 남자들이 낫다』며 나섰고 축구연합회도 나서 결국 구청이 주관하기로 했다. 의사·약사들은 순회진료를 제의했다.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자』 는 제안도 나와 부대사업으로 3월부터 함께 실시키로 했다.
처음 작은 규모로 계획됐던 사업에 하나 둘씩의 정성이 모아지며 참여 희망자와 단체가 줄을 잇자 구청 측은 3월3일 시민봉사실과 각 동사무소에「접수창구」를 설치, 조정키로 했다.
『장애자 올림픽이 열렸던 이 곳에서 꽃핀「이웃사촌의 정이 서울 전체로, 전국으로 확대되면 어렵게 사는 장애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자신도 월남전 상이용사로 자원봉사에 나선 유재구 상이군경회 지회장(42)은『삭막한 도시에서 이렇듯 따뜻한 온정이 피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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