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2년7개월 만에 8번 바뀐 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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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1일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당 의장실을 나서고 있다. 강정현 기자

1일 오전 10시30분. 의장직 사퇴 발표를 위해 중앙당 기자실로 들어온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표정은 오히려 하루 전보다 밝았다. 홀가분해 보였다. 그는 "의장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하겠다"고 말한 뒤 질문을 받지 않고 떠났다. 몽골 기병의 깃발을 들고 당 의장에 취임한 지 104일 만이다.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다. 돌아갈 의원 사무실도 없다. 그래서인지 우상호 대변인은 "3층 주차장(쪽)으로 당을 떠나 나가시게 된다"며 정 의장의 퇴장 모습을 중계했다. 같은 시각 한 층 아래 회의실에선 김근태.김두관.김혁규.조배숙 최고위원이 후속 지도체제를 논의했다. 지난 2월 전당대회에서 2위를 한 김근태 위원이 의장직을 이어받느냐, 아니면 최고위원 전원이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느냐 하는 두 갈래 길을 놓고 이들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5일 오후 소속 의원과 중앙위원 연석회의를 소집해 결론을 내기로 했다.

◆ 정동영의 미래는=정 의장은 사퇴 회견 첫머리에 "지금 이 순간 '현애살수장부아(縣崖撒手丈夫兒)'라는 말이 생각난다"고 했다.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탁 놓아 버리는 것이 대장부다운 태도라는 뜻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한테 써주신 글"이라고 설명했다. 자신도 아무런 미련 없이, 깨끗하게 물러난다는 비유다. 우윤근 수석 비서부실장은 "정 의장은 의장 취임 때 이미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거 도중 정 의장의 정계개편-선거 후 민주당 등 한나라당 집권 반대세력과 대연합을 추진하겠다는-발언이 김두관 위원 등에 의해 '정치적 꼼수'로 비판받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 혼신을 다한 정 의장의 본심을 생각하면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다"는 것이 정 의장 측 정서다. 선거 판세가 어려워지면서 정 의장의 대다수 참모는 "모든 것을 던지자. 앞날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인위적인 데뷔(재등장) 계획을 짜지 말자"고 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국민이 원하면 정동영에게 다시 기회가 오는 것이고, 원하지 않으면 영영 잊혀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정 의장 본인도 '길게 정치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말했다.

회견 후 종합검진을 받으러 병원으로 직행한 정 의장은 당분간 정치 영역에 직접 발을 담그는 행보를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반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정책과 이념적 좌표 설정에 몰두한다는 계획이다. 보다 한 발짝 떨어져 한국 상황을 보기 위해 정 의장에게 일정기간 연수 형태의 해외 출국을 권하는 참모들도 있다. 정 의장 측은 7월 재.보선과 9월 정기국회에 즈음한 정계개편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정동영'을 필요로 하는 목소리가 다시 생겨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정 의장은 과거 민주당 정풍운동과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보듯 수차례 정치적 국면을 주도해 왔다"며 "겸허하게 실력을 쌓으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김근태 체제 유력=후속 지도체제와 관련해 네 명의 최고위원 중 김두관 위원은 김근태 위원의 승계를 주장하고 있다. 정 의장과 가까운 김혁규.조배숙 위원은 "이번 패배는 지도부 전체가 책임져야 할 만한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내 분위기는 김 위원의 승계 쪽으로 흐른다. 우선 정 의장이 지난달 31일 저녁 김 위원을 만나 "당을 이끌어 달라"고 했다. 이용희.유재건.유인태 의원 등 당 중진들과 김영춘.이화영 의원 등 초.재선 그룹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왜 의장만 책임져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당사자인 김근태 위원은 "엄중한 상황에선 책임지는 게 맞지만 여러 의원이 승계를 요구하고 있어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 측은 "김 위원 개인으로 보자면 동반 사퇴하는 것이 낫지만 당의 앞날이 걱정"이라며 "당내 다양한 계파에서 모두 의장직을 맡으라고 한다"고 전했다.

김정욱 기자<jwkim@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바로잡습니다

6월 2일자 5면 '김근태냐 비대위 체제냐'기사 가운데 정동영 당시 의장이 퇴임사에서 현애철수장부아(縣崖撤手丈夫兒)란 말을 했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한자 성어 중 '철(撤)'자는 '살(撒)'자로 써야 맞습니다. 이 성어는 원래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에게 전한 것으로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탁 놓아 버리는 것이 대장부다운 태도"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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