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회담 하루 전 전격 연기 … 핵 리스트 접점 못 찾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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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북·미 고위급 회담 공식 발표(현지시간 5일 오후 5시15분)부터 연기 발표(7일 0시1분)까지는 30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국무부가 회담 연기를 심야에 발표한 자체가 흔치 않은 장면이다. 국무부 헤더 나워트 대변인은 7일 고위급 회담 연기 이유를 묻는 중앙일보의 서면 질의에 “현재로선 성명에서 밝힌 것 이상으로는 제공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고 답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도 연기 사유와 관련해 “미 측으로부터 설명은 들었지만 어느 쪽에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국무부 성명을 참고해 달라”고 말을 아꼈다. 이번 회담의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 당국자가 경위를 설명하거나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회담 연기를 공식 발표하기 전 카운터파트인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게 전화해 관련 사항을 설명했다고 한다.

미 국무부 “따로 밝힐 정보 없다” #북 겨냥 비판·불쾌감 표출은 없어 #김정은의 판 깨기 의도는 아닌 듯 #회담 장기 지연 땐 협상 동력 차질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멀고 먼 길을 가는 중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미국 측이 공식 발표에서 일정을 다시 잡겠다고 한 것을 주목해 달라”고도 당부했다. “무기한 연기라고 보기는 힘들고 그냥 연기”라면서다. 정부는 공식 확인하지 않고 있지만 연기를 요청한 쪽은 북한 측이라고 한다. 상세하게 사유를 밝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만나기로 한 날짜를 연기하거나 약속해 놓고 안 나오는 것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며 “이런저런 이유를 드는데 북한으로선 회담을 연기하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8일 뉴욕 회담을 위해선 6일께 베이징 공항에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나타났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연기를 놓곤 본격적인 핵 협상 테이블에 앉을 시점이 되자 북한이 과거의 ‘협상 교본’을 다시 꺼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단 북한이 기존에 써 왔던 ‘벼랑끝 전술’과는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5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잇따라 담화를 내고 거친 표현으로 미 정부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비난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해 버려 당황했던 ‘학습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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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부 성명에도 북한에 대한 불쾌감이나 비판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이 아예 판을 깨려는 의도를 드러냈거나 이전처럼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면 국무부 성명도 훨씬 강도 높게 나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위급 회담 연기의 주된 배경으로 봤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통일안보센터장은 “북한이 일정이 맞지 않는다고 통보하고, 미국도 굳이 아쉬울 것 없다는 입장으로 이를 받아들인 상황으로 보인다”며 “미국이 검증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계속 강조하는 데 대해 북한이 부담을 느낀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미 관계에 정통한 소식통은 “미국은 그간 물밑에서 북한과 접촉하면서 협상 전략을 대부분 완성해 놓은 것으로 안다. 영변·동창리·풍계리 사찰에 더해 최소 2005년 신고 이후 북한이 영변에 몰래 추가로 확충한 시설 현황과 생산한 핵물질 양을 신고하라는 게 미국 입장이었는데, 북한이 이에 응할 생각이 아직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숨겼던 핵 상황을 얼마나 정직하게 신고하느냐에 따라 곧바로 북한의 진정성이 드러난다”고도 설명했다. 북한이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취지다. 외부 요인이 연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9~10일 워싱턴에서 열릴 미·중 외교안보 대화의 주된 의제가 북핵 문제다. 이달 말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달 중 러시아를 방문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북한이 본격적인 비핵화 협상에 나서기 전에 한반도 외교전부터 점검해 득실부터 따지는 수순이다.

정부는 이번 연기가 회담 중단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회담 연기가 장기화할 경우 북핵 협상은 또 동력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북핵에 흥미를 잃은 백악관이 북핵을 후순위로 돌리거나, 북한이 벼랑 끝 협상술을 재구사할 가능성도 있는 만큼 북·미 협상의 유동성은 더 커지게 됐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유지혜·권유진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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