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뭐길래 뒤집힌 재판에 기대와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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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지난 3월 3일 전북 무주의 캠핑장에서 30대 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충남 논산에 사는 이모(33ㆍ여)씨와 그의 남편이었다. 이씨 부부는 “죽어서라도 끝까지 복수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남편의 친구 박모(37)씨에게 남긴 표현이었다.

대법원, 친구 부인 성폭행 혐의 무죄 사건 파기환송 #원심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 결여 판결 지적 #지난 4월 처음 등장 후 성폭력 재판 변화 예고

부부가 죽음을 선택한 배경은 친구의 부인인 이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씨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1심은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뤄진 2심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부는 사실상 유일한 객관적 증거인 모텔 폐쇄회로TV(CCTV) 녹화자료와 사건 이후 이씨의 행동을 토대로 이 같은 판단을 했다.

1심과 2심은 이씨가 협박 끝에 모텔에 끌려간 것이라면 저항 등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있었을 것이라며 그렇지 않은 CCTV 속 이씨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무죄로 봤다. 모텔에서 나온 뒤의 모습에 대해서도 “다시 차에 타는 모습은 강간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폭력조직원인 박씨가 남편과 자녀를 해칠 것처럼 위협했다는 이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이번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지난 31일 이 사건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무죄 판단한 원심의 판결이 잘못된 것으로 보이니 다시 재판하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인정될 여러 사정이 있는데도 증명력을 배척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은 사실을 오인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했다.

특히 원심 판결에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 없다고 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가 모텔에서 ‘성폭력 피해자’처럼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고 판단하라는 의미다.

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대법원은 그동안 폭행과 협박에 시달려온 이씨가 저항 등 박씨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박씨와 이씨가 앞뒤로 떨어져 걸어가는 모텔 CCTV 화면을 두고도 “(이것만 보고 원심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대법원 판결에서 지난 4월 처음 등장했다. 대법원 제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대학교수가 낸 해임 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했다”고 2심 재판부의 판단을 지적했다. 또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대법원의 잇따른 지적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하급심 패러다임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범행 직전이나 직후 피해자의 행동 등 단편적인 상황에만 치우치지 않고 법원이 깊이 있는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다.

우려도 있다. 법원이 지나치게 여성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객관성을 잃은 재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주장이 곧 증거’가 돼 증거재판주의나 무죄 추정 원칙이 깨질지 모른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지적은 피해자가 법원 판결로 두 번 상처를 입는 일을 줄일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자칫 무고 등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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