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6년부터 일본 통해 방북추진-정주영 회장이 밝힌 방북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9일 밤 국회의장공관에서 가진 의원간담회에서 자신의 북한방문 배경과 과정, 성과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정씨는 자신의 방북 결과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일고 있고, 특히「주도권」문제가 집중 거론되고있는 점 등이 마음에 걸린 듯 『방북에 앞서 노태우 대통령을 방문했고 노 대통령도 잘 다녀오라고 했다』고 강조, 단독 북행이 아니었음을 은연중 역설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꾸준히 나온 김일성 면담설, 금강산과 설악산의 연계개발은 공식 부인했다.
정씨는 특히 금강산-설악산 연계개발문제에 대해 『그 문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정씨는 이에 덧붙여『김일성과 만난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원산조선소 건설·철도차량공장 건설 등은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하면서 『언론이 앞서간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 언론보도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정씨는 이날 간담회에서 이홍구 통일원장관이 국무회의에서 『88년부터 추진한다』고 설명한 것과는 달리 86년부터 일본의 6대상사를 통해 방북관계를 타진했음을 밝히고 87년 7월과 같은 해 12월 2일 등 3차례에 걸쳐 허담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며 그간의 경위를 설명.
정씨는 이번 방북 때 일본에 귀화한 교포실업가 손달원씨와 동행했다고 밝혔는데 손 씨가 지난 8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사실상 금강산개발을 제의했다는 것. 손씨는 금강산을 찍은 비디오와 김일성과 만찬을 같이하는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그때 허담이 금강산에 호텔을 세우자는 제안을 해왔는데 손씨 자신은 남한의 정주영씨라는 기업인이 고향도 이북이고 해서 할만하다고 대답했는데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더라는 것.
정씨는 흥미가 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87년 7월 손씨를 통해 허담 명의의 초청장이 와 안무혁 당시 안기부장과 의논했더니 안 부장은 신분보장이 어려우니 가지 말라고 해 포기하고 초청장은 안기부에 주었다고 했다.
88년 7·7성명 후 허담의 초청장이 또 와서 안기부장·외무장관·통일원장관과 협의했으나 모두 시기상조라고 해 『초청해줘 감사한다. 남북한민족을 사랑한다. 남북한이 잘되기를 빈다는 4줄짜리의 거절편지를 보냈는데 국명은 안쓰고 허담 선생 대인이라고만 써보냈다』는 것이다.
정씨는 88년 11월 2일 허담이 다시 초청장을 보냈는데 마지막 초청장에는 빠른 시일 내에 북한을 방문해 달라며 △금강산개발 △합영법에 의한 합작회사 설립 △남북교류 △친지가 있는 고향방문 순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그같은 방북계획을 정부측에서 누가 처음 허용했느냐는 의원들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하면서도 「릴리」전 주한 미국대사도 만난 사실을 공개했는데 「릴리」는 『신중히 대처해줄 것』을 주문했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는 또 귀국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실상을 미화하지 않았느냐는 일부 지적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실상과 친·인척의 생활상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고향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포장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옛날 자동차가 못다녔던 길에 비해 좋아졌다는 얘기를 과대해석 한 것 같다』고 주장.
그와 함께 『북한이 전국에서 친척 70명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사진도 찍었는데 친지들도 한결같이 새옷을 입었는데 모두 같은 옷감으로 만든 것을 보니 생활상을 짐작하겠더라. 잔치를 한다고 음식을 차렸는데 음식과 젓가락까지 모두 기관에서 가져왔더라』고 공개했다.
정씨는 『북한에 가기 전 안기부에서 교육을 받았다』며 『북한으로 떠나기에 앞서 노 대통령에게 출국인사를 했다』고 공개했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내가 혹시 김일성을 만나게 되면 전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내가 당신(김일성)을 해롭게는 안할 것」이라는 말만 전해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방북 중 노 대통령의 이같은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방북 중 북한측이 『팀스피리트 훈련의 중단과 미군철수를 해야 만사가 잘돼가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자신이 『초청장에 없는 얘기를 왜 하느냐』고 되물었더니 그 얘기는 쑥 들어갔다고 소개하고 그런데도 5일간 안내를 맡은 전금철은 계속해 팀스피리트 문제를 거론했다고 털어놓았다.
정씨는 북한측이 남한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데모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래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기에 이런 것만 봐서는 안된다고 해주었다면서 6·25이후 그런 상황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남한이 흔들린다고 오판하면 안된다는 얘기도 해주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씨는 북한측이 마련한 금강산개발계획은 엉성하더라며 피크타임에 12만명을 유치하는 시설로 되어있는데 호텔은 관광객이 증가하는데 따라 늘려야지 처음부터 정하는 건 틀렸다고 해줬다고 밝혔다.
정씨는 또 남한에서도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고 했더니 북한측은 안된다고 하다가 다른 나라 사람한테는 구경시키면서 같은 민족에게는 안 하느냐고 장시간 했더니 결국 응낙했고 금강산 쪽엔 미군이 없어 그쪽으로 통과시키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며 남쪽에서 비자를 발급하고 북쪽이 확인하면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약 2시간 반 이상의 간담회가 끝난 후 박관용 통일특위위원장은 『과연 금강산개발계획이 실현될 것인지에 대한 회의적 관점의 질문이 나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고도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