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한달 휴가…3년치 몰아가도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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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광조씨가 갖고 있는 TV는 10년 전에 산 구닥다리 고물이다. 소련제 20인치 컬러TV인데 화면은 언제나 초록색 일색이고, 안테나는 아파트 전체로 들어와 연결되는 선이 없기 때문에 가는 전선 같은 줄 안테나를 한발 길이만큼 옆으로 길게 늘여놓고 쓴다. 또 진공관식이기 때문에 처음 TV를 켜면 진공관이 가열돼야 하므로 1분 정도 기다려야 비로소 화면이 나온다.
TV 역시 돈이 없어서 새것으로 바꾸지 않는게 아니다. 요즘도 레닌그라드의 3∼4곳 되는TV가게에 가면 화면 크기에 따라 한대에 5백∼7백루불씩 주면 그리 어렵지 않게 TV를 살수는 있다. TV값이 그의 한달 봉급을 조금 넘는 셈이다.
그러나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새것을 사봐야 지금 것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안 산다.
소니와 같은 외국제 TV는 거기에 비하면 정말 물건이 좋다. 그러나 그런 외국제 TV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고, 또 사고 싶어도 돌로(소련 사람들은 달러를 이렇게 발음한다)가 있어야지 루블로는 안 된다.
작년 5월인가 레닌그라드전자 쇼가 있었을 때 그도 가서 구경을 했다. 그때 한국업체들이 내놓은 TV·VTR·음향기기 등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갖고 싶도록 질이 좋은 물건들을 그는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양씨 성을 쓰는 한국사람이 그에게 명함을 줬는데 그는 지금도 그 명함을 갖고 있다.
라디오 채널은 FM이 2개, AM이 4개 있다.
그러나 FM은 보통 라디오로는 들을 수가 없고 어쩌다 귀한 선물로 받는 외국제 트랜지스터 소형 라디오가 생겨야 들을 수 있다.
그는 아파트 문 바로 안쪽 외에 크기가 가로 20cm·세로 30cm쯤 되는 상자모양의 라디오를 한 대 달아 놓고 있다.
채널 4개를 고를 수 있는 4단 레버와 소리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회전스위치 단 2개만이 달려 있는 이 라디오를 그는 거의 하루종일 켜놓는다.
라디오가 쓰는 전기 값은 집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라디오를 꺼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안하는 것이다.
어떻든 물건이 귀하다지만 그 중에서도 전자제품들은 가장 귀하고 또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9살짜리 아들 예브게니아도 언젠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더니 VTR가 그렇게 갖고 싶은 모양이다.
레닌그라드시의 신문은 4개가 있는데 그는 그중 3개를 본다.
어느 신문이나 하루 4면인데 매주 목요일은 신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보는 신문은 조간인 레닌그라드 프라우다지와 석간인 스포츠신문, 그리고 청년위원회 발행 신문이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레닌그라드 프라우다뿐이고 나머지 2개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놈이 보고 싶다고 해 보는 것이다.
청년위원회 발행 신문에는 요즈음 브레즈네프 시대에 잘못한 일을 비판하는 기사가 큼직큼직하게 실린다.
신문은 1년치씩을 한꺼번에 계약하는데 어느 신문이든 하루에 3코페이카씩이다.
그는 당원이 아니다.
당원이 된다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당원이 되면 직장에서 빨리 올라가고 하는 것 같은 좋은 점도 있지만 뭘 하나 해도 『당원이 그럴 수가 있느냐』 고 할 때가 많고, 또 실제로 당원으로서 해야할 일이 이것저것 많다.
당원이 아니라고 해서 살기에 불편한 것도 별로 없다.
또 그는 지금껏 KGB를 의식하고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그저 하는, 사는 재미라고는 별로 느낄 것이 없지만 사는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중상류의 평범한 레닌그라드 시민일 뿐이다.
대부분의 다른 소련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1년에 한달씩의 휴가를 받는다.
한달 간의 휴가를 그는 아무 때나 원할 때 쓸 수 있다.
만일 금년에 휴가를 안주면 내년에 한데 몰아서 두달 간의 휴가를 가질 수도 있다.
또 만일 3년치 휴가를 한데 몰아 쓰면, 다시 말해 2년 간을 휴가 없이 계속 일하고 나면 석달의 휴가를 받으면서 덧붙여 휴가여행을 갈때 소련내의 어디를 가든 한 사람치의 기차 값을 거저 받는다.
휴가를 한꺼번에 석달씩이나 몰아쓸 땐 쓰더라도 그때까지는 휴가 없이 계속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휴가 때 가족들과 함께 주로 남쪽으로 여행을 간다.
재작년에는 흑해로 해수욕을 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도 없이 붐 비는 통에 고생을 했고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흑해로 갈 생각이 없다. 비행기 값은 비싸고, 또 예약도 그리 쉽지 않아 대부분 기차로 여행을 하는데 흑해까지 갈 때는 한 사람 당 편도에 20루블씩 들었다.
그는 2년에 한번 꼴로 사할린의 형제들을 만나러 간다.
이때는 비행기를 타고 간다. 기차로는 사나흘씩 걸리기 때문이다.
비행기 값은 한 사람 당 편도 1백60루블씩이니까 그의 가족이 다갔다오려면 1천2백80루블이 든다.
그의 석달치 봉급과 맞먹는 셈인데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비행기 값이 아무리 비싸도 추석 같은 때 1년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갔었다.
사할린의 한국사람들은 그냥 양력으로 8월15일에 추석을 쉰다.
매주 토·일요일은 쉬는 날이니까 그는 여름에는 주말에 레닌그라드 근처의 숲으로 차를 몰고 가족들과 함께 1박2일의 캠핑을 가곤 한다.
요즘 같은 겨울에 그는 대개 집에 있고 아이들만 스케이트를 타러 번질 나게 들락거린다.
스키는 아직 없다.
매달 2일은 월급날이다.
만일 월급을 나누어 받고 싶으면 매달 2일과 17일 두 번에 나누어서 받을 수 있다.
그에게는 대학교에서 받는 월급 외에 부수입이 있다. 강사료다.
그는 물리학 강의를 하고 있는데 45분짜리 강의 1시간에 4루불씩 받는다.
대학 학기는 9월에 시작해서겨울방학이 10일 있고 다음해 6월에 끝난다.
7∼8월 두달 간이 여름방학이다.
따라서 1년에 10개월간 강의를 하게 되는데, 그는 1년에 강사료로 1천5백루블을 받으니까1년에 3백75시간, 한달 평균 37∼38시간, 1주일에 평균 9∼10시간의 강의를 하는 셈이다.
레닌그라드대학에는 북조선에서 온 20여명의 유학생이 있다. 여학생은 없고 전부 남학생이다.
그의 물리학 강의를 듣는 학생도 있다.
그들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다. 어김없이 1주일마다 다 모여 지도자동지가 한사람 한 사람의 성격을 점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다른 학생들과 비교할 때 그의 물리학 강의와 같은 경우 실험실습처럼 손으로 직접 해보는 것을 시키면 참 못한다.
같은 한국사람인데도 남북한 사람들은 참 다르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남조선 사람들은 마음이 열렸으나 북조선 사람들은 마음이 닫혔다고 그는 보고 있다.
『북조선 사람들은 자유가 없는 것 같다』고 그는 서슴없이 말한다.
이제껏 남조선 사람들은 볼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작년에 레닌그라드 전자 쇼에서 만났던 양씨와 같이 요즘엔 남조선사람들도 이곳 레닌그라드에 많이 들어오고 있어 남북한 사람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됐다.
어제는 남조선에서 온 신문기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물론 남조선기자들이 온 것을 몰랐었고 이곳 레닌그라드의 TV·라디오 위원회에서 대외관계 일을 보고 있는 여성동지인 엘레나· 코노발로바가 그의 집으로 연락을 해 저녁을 함께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덕분에 그는 남조선 기자들이 묵고 있는 호텔의 2층 식당에서 모처럼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소련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묵는 호텔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다.
나는 외국사람이 있거나 볼 일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호텔 입구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에게 몇푼 찔러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실제로 외국인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호텔출입을 한다.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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