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라오다메아」는 트로야 전쟁 영웅의 아내였다. 그녀는 전사한 남편을 그리워하다 못해 집안에 남편의 납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우스신에게 빌었다. 세시간만이라도 좋으니 남편의 납 인형에 생명을 불어 넣어 달라고. 애원을 들은 제우스신은 망령의 세계로 내려가 그 남편의 영혼을 찾아 납 인형에 넣어 주었다.
꿈같은 세시간이 지나갔다. 무정하게도 남편은 다시 납 인형이 되었다.「라오다메아」는 그 순간자신의 가슴을 찔러 남편을 뒤쫓아 망령의 세계로 따라갔다. 이른바 동반자살을 「라오다메아 자살」이라고도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자살하는 사람의 극한 상황은 누구도 모른다. 자살을 학문으로 연구한 학자들도 있지만 자살을 예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자살자만 아는 미궁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미화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도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나은 상황은 없다. 햇볕을 보고 충동을 느껴 살인을 하는 소설을 쓴 「카뮈」마저도 자살은 멜로 드라마에 비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자살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다.』
「디드로」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어느 날「루소」와 연못가를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루소」는 불쑥 이런 말을 했다.『여보게, 나는 이 연못가에서 스무 번이나 투신하려고 했네.』「디드로」는 자살하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루소」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물 속에 손을 넣어 보니 차더란 말이야.』
「루소」가 아니라도 이것은 흔히 있는 농담이지만 우리는 물이 차갑다는 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차가운 죽음의 세계보다는 따뜻한 현실의 삶이 귀중하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요즘 서울 어느 아파트촌의 가장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목숨을 잃은 아들을 못 잊어 부인과 나머지 한 아들과 함께 자살해 버렸다. 영국 시인「R·L·스티븐슨」의 충고가 생각난다.
『한번 결혼한 사람은 착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 그에겐 자살할 수 있는 자격마저 없다.』
현대처럼 사단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