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레닌그라드 한국계 2세를 통해본 생활상-엄동에도 아이스크림 불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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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광조씨가 감자니, 쇠고기니 하는 물건값을 죄다 외고있을 정도로 물건값이 몇 년째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물건값을 나라가 정해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산원가라든가 이익이라든가 또는 세금이라든가 하는 것을 물으면 서로 얘기가 안 된다. 그런 단어의 뜻이 그의 생활이나 생각 속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김씨도 『좋은 물건은 값이 비싸다』라는 사실만큼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가끔 국가상점 아닌 개인상점에 간다.
개인상점은 레닌그라드 시안에 열 개쯤 있다. 상점마다 파는 물건들이 다 달라, 어디는 채소·과일·고기·꽃을, 어디는 생선을, 또 어디는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판다.
개인 상점이라고 부르지만 점포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큰 건물 안에 많은 개인들이 저마다의 가계를 차려놓고 물건을 판다.
이곳에서는 물건값이 국가상점에 비해 보통 3∼7배씩 비싸다.
그뿐 아니라 물건값이 매일 바뀐다. 소련에서 물건값이 자주 바뀌는 곳은 이곳 개인시장뿐이다. 이런 개인시장에선 누구든 장사를 할 수가 있다.
누구든 자기가 생산한 물건을 아침 일찍 들고 와 30코페이카를 나라에 내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장사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물건을 팔아 버는 돈은 다 자기가 챙겨 가질 수가 있다.
이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과연 국가상점에서 파는 물건들 보다 질이 좋다.
고기만 하더라도 국가상점의 고기는 꽁꽁 얼린 고기라 맛이 없지만 개인상점의 고기는 얼리지 않은 것이라 맛있다.
대신 국가상점에서는 언제나 1km에 2루블하는 쇠고기가 개인상점에서는 10루블, 국가 상점의 2·4루블 짜리 돼지고기가 7루블하는 식으로 모두 비싸다.
그렇다고 누가 보나 물건의 질이 값 차이만큼 3∼7배씩 차이가 난다고 할 수는 없고 그저 약간 질이 좋을 뿐이다. 그러나 물건값이 품질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상점 값 아니면 개인상점 값 둘 중의 하나니 그저 그 만큼 비싸려니 할뿐이다.
어쨌든 개인상점의 물건들은 질이 좀 낫지만 값이 비싸 그는 주위에 병자가 생겼거나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을 때나 가끔 개인상점엘 들른다.
개인상점들 주위에는 할머니들이 집에서 털실로 직접 짠 목도리·모자 등을 3∼5개씩 들고 서서 팔고 있는데, 이 장사는 나라의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가끔 경찰들이 들이닥쳐 벌금을 물리기도 한다. 우리로 치면 노점상 일제단속인 것이다.
개인상점들 말고 협동조합이란 것도 있다.
누구나 몇이 모여 조합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팔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데 이때는 나라에 얼마씩의 돈을 꼬박꼬박 내야한다.
이런 협동조합 상점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 레닌그라드 시에는 몇 곳 있다. 역시 국가상점들 보다 물론 물건값이 비싸지만 값이 비싼 것에 비해 물건의 질이 마음에 안 들기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런 곳엘 가면 아디다스·퓨마와 같은 상표를 탄 모자·목도리·양말도 눈에 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가짜라는 것을 그는 안다.
녭스키가의 푸슈킨 공원 주변에 가면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걸어놓고 파는 화가들이 많이 모여있다.
또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을 그 자리에서 그려주고는 돈을 받는 거리의 화가들은 많다.
「고르바초프」가 들어서기 2년전 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은 없었다.
「브레즈네프」시절에는 그 같은 그림장사를 금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그림을 몰래 팔고 샀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처럼 내놓고 팔게 됐으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넥스키가를 가다보면 곳곳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본다.
아마도 입을 즐겁게 할 것이 아이스크림을 빼고는 별로 없는 까닭일 게다.
그는 원래 술을 즐겨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퇴근하면서 모처럼 「동무」들과 한잔하고 싶어도 별로 갈만한 데가 없어, 대개는 보트카를 사가지고 집에 가서함께 마신다. 보트카는 한때 금주령·절주령이 내려 구하기가 힘들었지만 요새는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한다. 보트카를 사려고 줄을 섰다는 것도 이제는 지나간 얘기가 됐다.
요즘엔 레닌그라드 시에도 젊은애들이 모여 시끄러운 록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데가 한 스무 군데 있다는 얘기를 그도 들었지만, 그 자신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사실 TV를 틀어도 대학에 다니는 큰 아들놈은 맨날 록이 나오는 프로만 보려고 해서 그는 참 못마땅하다.
시끄럽기만 하지 어디 그게 음악이냐 말이다.
TV채널은 세개가 있다.
하나는 레닌그라드 지방TV고 나머지 두개는 모스크바 제1, 제2 TV다. 모스크바 중앙TV를 틀면 대부분 정치얘기라 그는 잘 안 본다. 레닌그라드 TV가 그에겐 그런 대로 재미있다.
정치얘기는 별로 없고 주로 음악·발레·연극·영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기야 TV가 재미가 없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밥먹고 TV보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은 없다.
생활수준이 중상이 되는 그의 집에서 TV는 유일한 오락기구니까 말이다. 【글-김수길기자|사진-장남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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