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꿈나무] 남의 집 허드렛일 하다 천국의 문을 연 오누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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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남쪽의 초원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마리트 턴크비스 그림
김상열 옮김, 마루벌, 48쪽, 1만3000원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살아야죠. 빨래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아이들을 상상해 보세요. 가슴이 아프죠? '남쪽의 초원 순난앵'의 마티아스와 안나는 오갈 데 없는 고아 오누이였어요. 못된 농부의 집에 얹혀 살게 된 오누이는 추운 겨울 헛간에서 우유를 짜고 외양간을 청소합니다. 겨울철에만 열리는 학교에 가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지만, 거기서도 그들은 왕따였어요. 어느 날 빨간 새(파랑새가 아니예요)가 안내해 준 환상의 공간 순난앵 마을에서 오누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답니다.

두 사람은 순난앵으로 통하는 문이 한 번 닫으면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그 문을 힘껏 닫아버려요. 이제 두 사람은 순난앵에서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된 거죠. 그런데 빙긋 웃으며 문을 닫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이유는 뭘까요. 얼어죽는 순간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성냥팔이 소녀가 떠오르는 까닭은 뭘까요. 순난앵 같은 곳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기 TV 시리즈 '말괄량이 삐삐'의 원작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쓴 린드그렌. 그가 창조한 삐삐는 지극히 독립적이고 엉뚱한 시각으로 어른들의 고정 관념을 조롱하죠. 마티아스와 안나의 웃음도 '해피 엔딩' 일색의 기존 동화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조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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