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3. 어머니의 태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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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어릴 적 내 눈에는 크고 듬직하던 고향 집이었는데 이젠 초라하고 낡은 개량 주택으로 변모해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들일이 한창인 여름이었지. 새참이 든 광주리를 일꾼들 앞에 내려놓고 열어보니 밥과 반찬은 온 데 간 데 없고 누런 놋수저만 가득하더라."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신 태몽 이야기다. 할머니는 "이번에는 꼬추가 틀림 없것지야. 사람을 먹여 살리자면 사내가 돼야지 여자 심으로 워떠케 그런 일을 하것냐, 영락없는 아들이다"며 기뻐하셨다. 손자를 확신한 할아버지도 "석 달 열흘 잔치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니셨다. 손이 귀한 집에서 어머니가 스무 살에 언니를 낳고, 3년 만에 나를 가지셨으니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귀한 아들 날 몸인디 함부로 해서야 쓰것냐"는 할머니의 배려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가 진통을 시작하자, 종손의 탄생을 축하하려는 친인척과 마을 어른들이 몰려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잔칫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딸이라는 소식을 들은 마을 어른들은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갔고, 잔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해졌을 터였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누워 있는 방문을 열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잠시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나 또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이나 기대를 받지 못한 채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로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말조차 제대로 못했다. 어머님은 걱정을 하면서도 나에겐 싫은 소리 한 마디 않으셨다. 오히려 더 많은 애정으로 보살펴주셨다. 그때까지 엄마 젖을 빨았던 것 같다. "엄마 찐"하고 품에 달려들면 언제나 나를 위해 따스한 가슴을 내주셨던 어머니.

말문이 트이자 나는 '마을에서 제일 말 잘하는 아이'가 됐다. 그동안 못한 말을 봇물 쏟듯 내뱉었다. 할머니는 이런 나와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부뚜막에 군불을 넣고 소죽을 끓이실 때면 나를 불러 "까라"고 하셨다.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라는 말씀에 나는 소죽이 다 끓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급 급장(반장)은 지방 고위관료의 딸이었다. 나를 비롯한 급우들이 검정고무신을 신을 때, 그 아이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듯 싶다.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다른 아이들은 두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 했지만, 급장만은 맨 앞에서 옆으로 팔을 벌리는 게 아닌가. 나도 그 아이처럼 하고 싶었다. 난 급장이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3개월쯤 지나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급장이 됐다.

나는 일본 아이들까지 제치고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엔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첫 성적표를 받아보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셨다. 내게 1등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던 내가 되레 "꼴등을 할까"하는 생각도 해 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는 성격은 그때부터 나타난 것 같다. '한 광주리 가득한 놋수저'는 수만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지금 신기하게 맞아떨어지는 태몽이 아닐 수 없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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