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홍범도 장군」싸고 공적 가열|김파|송우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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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항일무장독립투쟁사 속의 전설적 인물인 홍범도 장군의 일생을 놓고 연변의 교포시인과 국내 소설가 사이에 공방전이 오가고 있다. 이 논쟁은 연변에 거주하는 김파씨가 자신과 복정섭·황현걸 3인이 쓴 「실록 홍범도 장군」이란 글을 국내월간지 『사회와 사상』88년11·12, 89년 2월호)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 것. 이 글에 대해 국내에서 홍범도를 다년간 연구해온 여류소설가 송우혜씨는 김씨 등의 주장이 오류와 허점투성이라는 논문을 『역사비평』(겨울호)에 발표했다.(88년 12월22일자 본지참조) 이에 대해 김파씨는 송씨의 비판이「시기상조」라는 요지의 반론을 제기했고(88년12월29일자 본지참조), 송씨는 다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글을, 김씨는 「공동연구」를 통한 사실구명을 주장하는 글을 보내왔다. 두 사람이 보내온 논쟁의 글을 싣는다.

<정확한 사료 재발굴 후 논의를>「민족역사조사단」구성 현지답사 연구 절실
「실록 홍범도 장군」에 대한 송우혜씨의 논박은 필연적이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송씨가 입수한 기존 사료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논거의 정확 척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주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송씨가 제기한 일군의 공식문서, 당시의 신문기사 등 사료가 논박의 근거인데 그것 자체도 정확성의 여부가 아직까지는 긍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치하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있었으며 일제는 극력 노예화 역사를 고취했다.
때문에 일군의 문서에는 침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위·확대·위조·기만·왜곡한 사료와 확정적인 사료를 때와 수요에 따라 혼용한 것이 많으며 독립군 조직들에서도 자신들의 목적 달성과 안전 유지를 도모하기 위해 당시의 가혹한 역사적 환경 하에서 일군에 대응하여 가상적으로 꾸미고 위장한 사실들이 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역사적 근거로 된 것이 많다.
아울러 해방 후에는 이념체제의 차이와 지리적 환경의 부동성 및 단절상태로 남·북한, 한중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사료의 국한성과 편협성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념 차이와 관점의 불일치성으로 인하여 공동적인 발굴과 연구·정리가 없었다.
때문에 홍범도라는 역사인물에 대해서도 분단된 남과 북, 중국·소련 등지에서 각기 다르게 표출된 것은 오늘의 필연적인 실정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 자기의 사료와 관점이 유일 정확하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다. 왜냐하면 어느 일방에 그 정확한 척도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 민족이 처한 특수한 역사적·지리적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와 송우혜씨와의 논쟁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하등의 성과를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국적 해결을 할 수가 없다. 보다 효과적이고 확신적인 것은 남과 북, 중국·소련 등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자체가 국제적 범위에서 「민족역사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를 답사하고 증인을 방문, 모든 사료를 재발굴하여 집결하는 것이 일차적 급선무다.
제2차적으로는 국제적인 「민족역사학술회」를 통해 사료의 진가를 분석·선별·연구할 때만이 정확성과 전면성이 확립될 것이며 역사의 진실과 허위가 스스로 표출될 것이다·그때 가서 비로소 사실과 역사의 정확한 기준이 정립될 것이다.
때문에 송우혜씨의 논박의 동기는 당연한 일이면서도 근본적 해결은 볼 수 없는 것이 현 실정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정립하는 일은 홍범도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료의 시비가 혼돈·전도되어 있으므로 재정립이 더욱 필요하다.
특히 독립투쟁사의 정확한 정립은 우리 민족과 남북의 통일에 공통된 역사적 기반과 동질성 확보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김파(중국연변교포시인·독립운동연구가)>

<가족상황 등 불분명한 점 많다>출생지·부대명칭 등 기본적인 것 조차 안 맞아
중국 연변(북간도)의 시인인 김파씨 등 3인이 저술한 「실록 홍범도 장군」(『사회와 사상』1988년 11,12월호 게재)은 과연 믿을 만한가? 필자는 다년간 홍범도 관계 자료를 추적해오는 사람으로서, 「실록…」의 기록을 면밀하게 검증한 결과 전혀 믿을수 없는 것임을 밝혀냈다.(『역사비평』1988년 겨울호.「최근의 홍범도 연구, 오류·허점 많다」, 중앙 일 보. 1988년 12월22일자 기사 참조)
그러자 이에 대해 현재 방한중인 김파씨가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만을 들어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것은 지나치다』고 반박해왔다.(중앙일보 1988년12월 29일자)
그의 반박은 매우 부정직하고 불성실한 것이다. 필자의 글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전혀 지적하지 못한 채 덮어놓고 『면밀한 검토과정도 없이 성급하게 부정한다』는 말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글이 왜 「단편적인 몇 가지 사실」인가? 필자는 ①일본군 제13사단의 공식문서 ②홍범도의 무장항쟁을 지원했던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의 구춘선 회장의 공식문서 ③조선일버 1920년 12월9일자 기사 등 극히 중요한 적과 아군측의 공식문서는 물론 당시의 신문보도까지 면밀하게 검토하여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홍범도의 가족상황을 반증해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최근 공개된 소련 측의 자료로도 확고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김파씨 등이 연변에서 보았다는 홍범도의 여러 자손들(그들 조부의 본명은 홍종학인데 홍범도로 개명했다고 함)은 이름 그대로 홍종학의 자손일 뿐이다. 무덤 역시 홍종학의 무덤이다. 홍범도의 처자는 아들 하나를 빼고 모두 일본군에 피살됐고, 홍범도도 또한 홍종학이란 이름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후일담에 『황제「니콜라스」2세의 가족이 몰살될 때 「아나스타샤」공주만 살아 도피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내가 「아나스타샤」공주』라며 유럽에 나타난 처녀가 여럿이더란 이야기가 있거니와 「북간도에 돌아와 살다 죽은 홍범도설」역시 그 비슷한 소동의 하나로 보인다.
「실록…」은 이런 부정확한 가족상황을 근거로 출발했다는 치명적인 문제점 외에 명백한 표절 및 왜곡과 오류들을 도처에 안고 있다. 홍범도의 출생지·망명시기, 그의 부대의 공식명칭, 그가 수행한 전투의 상황 등 극히 기본적인 것조차 틀린다.
지난해 11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독립운동사 회의에 갔던 국내학자들이 전하기를 연변에서 온 학자들 역시 김파씨 등이 내세우는 「북간도에 와서 살다 죽은 홍범도 설」을 부인하더라고 한다. 현재 연변 현지에서조차 그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홍범도 장군의 무장독립투쟁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자료수집과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들의 기초적 구조가 사실에 접근하려는 진지한 자세여야 한다는 것이다. <송우혜(소설가·독립운동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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