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빚더미 남긴 「레이거노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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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나라나 대통령의 성패는 일일정무처리 자세나 결과로 결정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닉슨」이나 「카터」는 국사에 능동적이고 열심이었지만 「아이젠하워」는 골프나 즐기고 「로널드·레이건」은 시간만 나면 별장행이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전자들이 국민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춰지고 있는 반면 후자들은 놀랄만한 사람을 받고있다.
중요한 성패의 갈림길은 판단력에 놓여있다. 몇 가지 주요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이 있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백악관을 물러나는 「레이건」에 대해 국방력강화, 대소관계개선 등 업적들이 지적되고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성공은 인플레이션 문제에 대한 판단이었다.
8년 전 그의 집권당시 이란에 의해 인질로 잡힌 미대사관직원들의 구출이 큰 문제 거리가 돼있었지만 실제로 미국민과 나아가 국제경제에 더욱 심각했던 것은 치솟기만 하던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를 당선시킨 선거당일의 인플레율이 12%였다.
오일 쇼크 이후부터 악화된 경제는 그의 집권초인 81년과 82년 인플레이션 속의 불황으로 이어지고 실업률은 10.8%로 최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이건」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우선 과제라고 판단했다. 고금리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선봉장은 중앙은행장「볼커」연방준비위 의장이었다. 인플레억제를 위해 통화공급을 대폭 삭감하고 투자를 위축시키면서 고금리정책을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아도 높아져있던 실업율의 악화를 감수해야 했다.
「레이건」은 이 위험한 결정의 시기에 인플레이션 억제를 확신했고 「볼커」를 배후에서 적극 지원했다. 만약 「카터」였다면 이 같은 판단이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며 바로 이점에서 「레이건」의 차이점과 성공요인이 발견된다는 해석이다.
비판론자들은 현 미경제의 성공적 측면은 「레이건」과 무관하고 플루크(요행)라고 주장한다.
인플레이션은 「볼커」가 잡았고 또 다른 성공작 세금인하는 「제임스·베이커」재무장관이, 핵무기 제거는 「조지·슐츠」국무장관의 외교와 「고르바초프」 등장 덕분이라는 등의 빈정거림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레이건」의 또 하나의 강점은 과단성이었다. 81년 8월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1만1천여명의 항공통제사들이 노동법상 파업을 할 수 없게 돼있는 규정을 무시, 불법파업에 들어가자 「레이건」은 이들을 해고시켜 버렸다.
인플레이션 해결을 위해서는 고용수들이 피고용인들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는 일이 없어 한다는 견해를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비타협적 과단성을 과시했다.
10여년이 지나야 회복될 것으로 얘기되던 인플레율이 집권 3년 만인 83년에 4.1%로 내려간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레이건」의 판단력과 과단성의 승리임이 명백하다. 이를 바탕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의 완강한 고집은 감세정책에도 적용된다. 그는 집권하면서 레이거노믹스를 들고 나왔다. 시민들의 소득세를 줄여 소비와 투자를 창출,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신념이다. 당시 공화당대통령후보경쟁자 「조지·부시」도 이를 「주술경제」라고 비판하는 등 주변에서까지 조롱했지만 그의 확신은 부동이었다. 조세삭감이 일시적으로는 세입과 세출을 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활성화가 세금삭감을 벌충하고도 남게된다고 믿었다.
이 같은 감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86년 세법을 개정, 개인 최고소득세율을 70%에서28%로 삭감했다. 부자들을 위한 세법이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세율에 의한 부의 재분배정책에서 탈피하는 한편 저소득층의 빈곤퇴치를 도모한다는 얘기였다. 과거 세법으로는 부양가족 1명이 딸린 이혼여성의 연간수입이 1만달러인 경우 소득세가 9백달러였지만 새로운 세법으로는 면세가 됐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에 대한평가는 일단 부정적이다. 감세정책은 8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86년 세법개정으로 개인소득세삭감부분이 기업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86년 후 5년간 최소한 1전2백억달러가 법인영업세로 전가될 전망이고 이는 기업의 투자감소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소득세를 낮춰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투자를 진흥시키고 경제를 성공시키면 오히려 조세 세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적자만 누증되고 있다. 더구나 「무제한」의 국방비지출, 펜터건의 비효과적 국방예산사용 등까지 겹쳐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집권 초 적자규모가 3배로 늘어나고 이 갭을 외국에서 꾸어다 채우느라고 채권국이 세계최대채무국으로 전락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외채를 구할 수 있는 사실만도 큰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는 형편이다.
재정적자와 아울러 무역적자의 확대도 「레이건」시대의 유산이다. 미국상품의 질과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지만 「레이건」행정부는 주로 달러화 강세에 책임을 돌리고 손쉬운 방법으로 달러화평가절하에 열을 올렸다. 달러화가치를 60년대 초반수준으로 끌어내려 미산업의 수출경쟁력을 증대시킨다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무역적자가 감소되는 추세임은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 엔화는 달러에 비해 4O%가 높아지고 세계주요 재정파워로 부상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이제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있는 형편이다.
결과적으로 「레이건」경제의 실적평가는 상충적이다.
인플레를 억제, 물가를 안정시켜 6년 연속 성장세를 지속시킨 것은 긍정적 업적이고, 엄청난 재정 및 무역적자와 외채를 증가시킨 것은 수치스런 유산이다.
미국의 대통령학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레이건」이 대통령직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킨 인물로 후세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루킹스연구소의 「제임스·산드퀴스프」씨 같은 사람은 재정적자와 무역부문의 악화 때문에 그의 재직이 「재난」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레이건」의 명성은 「부시」의 경제정책 성공여부에 달린 셈이다. <워싱턴=한남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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