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트럼프-김정은의 사랑이 불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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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주 뉴욕 출장 중 당황스러웠던 장면 셋.

양다리 연애편지, 과장된 사랑 고백 #외교부와 대통령 종전선언 해석 차 왜?

#1 뉴욕에 온 문재인 대통령의 폭스뉴스 인터뷰.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기 때문에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 미국으로선 손해보는 일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불과 두 달 전, 워싱턴에 온 조현 외교부 1차관(당시 2차관)과의 특파원 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당시 조 차관은 “본부에 돌아가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 조 차관은 이렇게 답변을 보내왔다. “좀 더 신중한 검토를 한 결과,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에 대해 법적 효력(철회 가능성)을 논하기는 곤란하지만 일반론적으로 정치적 선언이라고 해도 일단 발표한 다음에는 함부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철회(결국 없던 일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외교부 내 조약과·국제법규과를 거느리는 책임자의 ‘유권해석’은 그랬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뉴욕 발언은 180도 달랐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신중한 검토를 거쳤다는 외교부의 해석과 대통령의 해석이 다른 이유는 뭘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은 2일 “종전선언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혼돈이다.

#2 이용호 북한 외무상의 지난달 29일 유엔 기조연설. 그는 종전선언 필요성을 역설하더니 말미에 돌연 유엔사 문제를 꺼냈다. 미군 지휘에 복종하는 연합군사령부에 불과한 주제에 왜 ‘유엔군사령부’란 호칭을 쓰냐는 것이었다. 법적 지위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는 “종전선언이 유엔사의 지위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우려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종전선언 개념에 김정은 위원장도 동의하고 있다”는 문 대통령의 지난달 25일 미 외교협회 연설과 어긋난다. 이 외무상의 주장은 북한이 종전선언 후 어떻게 나올지의 예고편일 수 있다. 또 하나. 종전선언에 남·북·미가 동의한다고 치자. 그게 끝일까. 정전협정 당사국인 중국은 “유엔사는 냉전시대 산물”이라며 해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남북이 기존 체제 유지를 약속한다고, 트럼프를 설득했다고 말끔히 해결될 성격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트럼프의 지난 26일 뉴욕 기자회견. 싱가포르에서 알아봤지만, 트럼프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떠든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빠졌다가 아예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운 좋게 내 자리에서 폼페이오 장관, 볼턴 보좌관 등의 표정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회견 내내 피식피식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트럼프의 말에는 신뢰를 보낼 수가 없었다. 오류와 과장이 넘쳤다. 자신이 한반도 전쟁을 막아내고 지켜낸 서울 인구가 ‘3000만 명’이란다. “(비핵화에) 2년, 3년, 또는 5개월이 걸리든 상관없다”는 말도 북한에 쉽게 양보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레토릭에 가깝다. 결국은 과시용이다. 그래서 외신들도 이제 그의 북한 발언엔 거의 무게를 두지 않는다. 81분 동안 나온 질문 44개 중 북한과 관련된 것은 단 두 개뿐이었던 이유다.

급기야 트럼프는 지난 주말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사랑 고백을 얻어낸 김정은의 연애편지 솜씨가 놀랍다. 둘의 사랑을 훼방놓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결실을 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김정은이 트럼프의 사랑 고백 바로 다음 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당신과 손잡고’란 연애편지를 띄우고 나선 사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중매자의 위험한 장담, 마음은 딴 데 있는 양다리 연애편지, 과장된 사랑 고백…, 그다지 마음이 놓이는 사랑이 아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