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혀가는 ‘경제 성장판’…설비투자 20년 만에 최장 감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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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비투자가 외환위기 이후 가장 오랜 기간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소비 증가세도 멈췄다. 내수의 두 축인 소비와 투자가 동반 부진을 보인 셈이다. 한국 경제가 하강세에 접어들었다는 위기 신호는 한층 뚜렷해졌다.

8월 설비투자 전달 대비 1.4% 감소 #소비 증가세도 멈춰서 #내수 두축 투자, 소비 부진 심화 #한국 경제 내리막길 진입 우려

통계청이 2일 내놓은 ‘8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설비투자는 전 달보다 1.4% 줄었다. 지난 3월 이후 6개월째 ‘마이너스(-)’ 행진이다. 1997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0개월 연속 설비투자가 줄어든 이후 최장 기간 설비투자 감소다.

그간 투자를 견인한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가 줄며 ‘투자 절벽’이 나타나고 있다. 어운선 통계청 산업동향과장은 “호조세를 보이던 반도체 업체의 설비투자가 올해 3·4월께 마무리되며 투자가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반도체 생산설비 등 특수산업용 기계를 포함한 기계류 투자는 8월에 한 달 전보다 3.8% 감소했다.

건설 투자 부문도 사정이 좋지 않다. 건설회사가 실제로 시공한 실적을 보여주는 건설기성은 전월 대비 1.3% 줄었다. 5·6월 두 달 연속 감소했다가 7월에 0.6% 늘었지만, 지난달에 다시 감소세로 전환했다. 부동산 경기가 한풀 꺾인 데다 정부가 최근 사회간접자본(SOC) 관련 예산을 줄여나간 결과로 풀이된다.

지난달 전체 산업생산은 전월 대비 0.5% 증가했다. 7월 이후 두 달 연속 늘었다. 제조업이 1.6% 늘며 증가세를 이끌었다. 하지만 6·7월에 늘었던 소비는 주춤했다. 8월이 휴가 성수기임에도 소비를 나타내는 소매판매지수의 전달 대비 증가율은 ‘0’ 에 머물렀다. 그나마 7월부터 시행된 승용차 개별소비세 인하가 감소세 전환을 막았다.

최악의 고용 한파에 내수 부진이 겹치며 경기 향방을 가늠하는 지표들도 한국 경제가 내리막길에 서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현재 경기 상태를 보여주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지난달에 98.9를 기록했다. 4월부터 5개월 연속 내림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8월(98.8) 이후 최저치다. 미래 경기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선행지수 순환변동치는 99.4를 나타냈다. 한 달 전보다 0.4포인트나 하락했다. 2016년 2월(0.4포인트 하락)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산업활동동향

산업활동동향

성장률도 점차 낮아질 거라는 게 주요 기관의 진단이다. LG경제연구원은 한국 경제 성장률이 올해 2.8%를 기록한 뒤 내년에는 2.5%로 고꾸라질 거로 봤다. 현대경제연구원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올해 2.8%, 내년 2.6%로 예상했다. 투자 부진이 이어질 거라는 전망이 주 근거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반도체 이외의 산업에서 투자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반도체마저도 투자가 꺾인 상황”이라며 “투자 부진에 수출도 증가세가 둔화할 것으로 보여 내년 성장률이 올해보다 낮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부진이 장기화해 성장엔진이 식으면 침체기가 길어질 수 있는 만큼 투자 심리를 시급히 살려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미국의 금리 인상 등으로 대외 투자 여건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기업의 비용구조를 악화시켜 기업의 투자 여력을 더욱 줄이고 있다”며 “기업의 비용을 늘리는 정책을 가급적 지양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제거해 기업의 투자 심리를 북돋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 전환 없이는 투자 감소에 따른 성장 저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민간의 투자를 실질적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의 궤도를 완전히 틀어야 한다”라며 “투자를 하는 기업에 대해선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의 방식으로 투자를 적극 독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종=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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