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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잿물에 쌀겨 풀어 빨래…놀랍다, 조상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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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태호의 잘 먹고 잘살기(17)

비누가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뭔가를 가마솥에 넣고 풀 쑤듯 고아서 덩어리를 만드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가제 비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중앙포토]

비누가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뭔가를 가마솥에 넣고 풀 쑤듯 고아서 덩어리를 만드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가제 비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중앙포토]

옛날에는 비누가 귀했다. 필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세숫비누를 거의 써 본 적이 없다. 빨래는 시커먼 벽돌 같은 덩어리로 문대고 치대는 것을 목격했다. 어머니가 뭔가 가마솥에 넣고 풀 쑤듯 고아서 그 덩어리를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자가제 비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옛날 오일장에 아버지가 뭔가 하얀 덩어리를 새끼줄에 묶어 사오는 걸 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에 애들은 근방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게 바로 비누 만드는 양잿물이었다. 손에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옷이 상할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옛적 시집살이가 매서워 젊은 아낙이 생의 마감용으로 쓰기도 했다.

그럼 잿물은 뭐고 양잿물은 뭔가. 잿물은 말 그대로 재에 물을 부어 녹여낸 것이다. 짚이나 풀을 태운, 완전히 연소한 하얗게 변한 재를 헝겊 위에 올려놓고 물을 붓고 내리면 재 속 미네랄, 특히 알칼리이온이 녹아 나온다. 받은 물은 강한 알칼리성이 된다. 즉 나트륨, 칼륨 등이 많이 있어 수산화나트륨(NaOH)나 수산화칼륨(KOH)로 되어 강알칼리용액이 된다. 농도가 묽으면 졸여서 농축하기도 한다. 이게 잿물이다.

방춘웅 옹기장이 항아리에 잿물을 입히고 있는 모습. 우리 조상은 수 천 년 전부터 도자기의 유액, 쪽 염색 등에 잿물을 이용했다. 양잿물이라는 단어는 서양 잿물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양잿물이 이용된 건 100여년이 조금 넘었다. [중앙포토]

방춘웅 옹기장이 항아리에 잿물을 입히고 있는 모습. 우리 조상은 수 천 년 전부터 도자기의 유액, 쪽 염색 등에 잿물을 이용했다. 양잿물이라는 단어는 서양 잿물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양잿물이 이용된 건 100여년이 조금 넘었다. [중앙포토]

잿물 중에서도 양잿물은 NaOH, 즉 가성소다만을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서양 잿물이라는 뜻이다. 양잿물이 나온 건 100여년 조금 넘었다. 용도가 다양하다. 수 천 년 전부터 도자기의 유액, 쪽 염색 등에 우리 조상은 이렇게 잿물을 만들어 썼다.

비누는 예외 없이 지방산의 나트륨(Na)염이다. 이른바 기름에 양잿물을 넣고 반응시키면 지방이 가수분해되면서 비누가 된다. 비누를 계면활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 층과 기름층을 섞이게 하는, 즉 계면을 없애주는 물질을 통틀어 계면활성제라 부른다. 그러면 비누의 종류가 아주 많아진다.

좀 어렵게 말하면 친수성기(물과의 친화성이 강한 극성이 있는 원자단)와 소수성기(물과의 친화성이 적고 기름과의 친화성이 큰 무극성 원자단)를 동시에 가진 분자는 대개 비누의 성질을 띤다. 이런 두 기의 종류와 성질에 따라 비누의 종류도 세척력도 달라진다.

식물 중에는 비누 성분이 있는 것이 흔하다. 물에 비벼 거품이 많이 나는 재료는 세척 효과가 있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사포닌도 계면활성능이 강해 비누의 역할을 한다. 콩이나 창포 같은 데에 많이 들어 있다. 창포에 머리 감고 분꽃으로 단장한다는 바로 그 식물이다.

저공해 비누를 제조하고 있는 녹원생활협동조합원들. 지방이나 기름에 양잿물을 넣고 저어주면 한참 지나 비누가 된다. 이렇게 만든 비누는 자연에 흘려보냈을 때 미생물에 의해 잘 분해되기 때문에 정화가 쉬워 친환경 비누가 된다. [중앙포토]

저공해 비누를 제조하고 있는 녹원생활협동조합원들. 지방이나 기름에 양잿물을 넣고 저어주면 한참 지나 비누가 된다. 이렇게 만든 비누는 자연에 흘려보냈을 때 미생물에 의해 잘 분해되기 때문에 정화가 쉬워 친환경 비누가 된다. [중앙포토]

비누를 만드는 방법이다. 지방이나 기름에 양잿물을 넣어 저어주면 한참 지나 비누가 된다. 이때 열을 가해주면 빨리 만들어진다. 환경 운동하는 부녀단체가 아파트촌을 돌면서 폐식용유를 수거해 비누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작업을 본 적이 있지 않나. 친환경 어쩌고 하면서 이를 선호하는 부류도 있다. 왜 친환경일까? 자연에 흘려보냈을 때 미생물에 의해 잘 분해되어 정화가 쉽기 때문이다. 세척력만 고려한 복잡한 구조를 가진 비누는 분해가 잘 안 돼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

시판하는 현대식 비누제조는 유지에 수산화나트륨 용액을 넣고 여기에 증기를 불어넣어 100℃ 정도로 가열해 비누화한다. 얻는 비누화액을  비누아교라고 하고 소금을 가하여 비누 덩어리를 위층에 떠오르게 하여 글리세린과 분리한다. 이를 여러 모양으로 성형한다. 지방 분자 한 개에서 세 개의 비누 분자가 나온다.

이런 반응을 영어로 ‘saponification’이라 하며 여기의 ‘sapon’은 비누라는 뜻이다. 옛날 비누를 사분이라 부른 기억이 늙은이들에게는 있을 게다. 사이비 과학이 좋아하는 사포닌도 비누라는 의미에서 나왔다.

1920년대 청계천 빨래터의 모습. 비누 없이 빨래를 할 때는 강가나 냇가에 빨랫방망이로 두들기며 땟물을 제거했다. [중앙포토]

1920년대 청계천 빨래터의 모습. 비누 없이 빨래를 할 때는 강가나 냇가에 빨랫방망이로 두들기며 땟물을 제거했다. [중앙포토]

옛날에는 기름이 귀했다. 식용유라고는 귀한 참기름밖에 없었다. 참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쓰는 바보는 없었다. 간혹 닭기름, 돼지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쓰는 부잣집은 있었다. 서민은 이런 기름을 떼어 보관했다가 솥뚜껑 뒤집어 기름 발라 전 부칠 때 사용했다. 그런데 값싼 비누 만드는 재료가 있었다. 바로 등겨다. 특히 쌀겨에는 지방성분이 많아 양잿물과 섞어두면 자연히 비누가 되었다. 이를 빨래하는 데 쓰려고 아버지가 장에서 양잿물을 사 왔다는 걸 성인이 돼 관련 공부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없는 집에는 보리등겨를 개떡 만들어 먹는 데 썼다. 비누 만들 여력도 없었다. 위생보다는 먹는 것이 첫째였으니까. 비누 없이도 빨래했다. 강가나 냇가에 빨랫방망이로 두들겨 패 땟물을 제거했다. 때가 많을 때는 양잿물을 푼 독에 빨래를 쌀겨와 함께 넣고 며칠을 재우면 자연히 비누가 만들어져 빨래 때를 지웠다.

조상의 지혜가 놀랍다. 그렇게 하면 비누가 만들어진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생활지혜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 이론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게 참 신기하기만 하다. 식혜도 그렇고 된장, 간장, 술 담금도 그렇다.

이태호 부산대 명예교수 leeth@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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