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계 인프라 지원, 서신 교류, 삼림 복구…‘로키’로 가는 정부 대북 경제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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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북한의 자체적인 통계 역량을 높이기 위한 기술적 지원에 나설 전망이다. 본격적인 남북 경제협력을 위한 물밑작업으로 해석된다.

18일 통일부와 기획재정부 등 주요 부처에 따르면 현재 북한은 전반적인 통계 역량이 부족해 신뢰도 높은 통계 생산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기재부는 북한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통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관련 시스템 구축 등을 지원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 조사원들에 대한 통계 교육, 데이터 분석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기법 전수, 컴퓨터ㆍ소프트웨어 등 장비 제공, 남북한 간의 통계 용어 표준화 협력 등의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궁극적으로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B) 같은 국제 금융기구 가입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WB는 약 300억 달러(약 33조5000억원, 2016년 기준)의 재원을 바탕으로 주요국에 경제성장 및 인프라 구축을 위한 개발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북한이 WB에 가입하면 경제개발을 위한 두둑한 ‘종잣돈’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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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WB에 가입하려면 먼저 IMF 회원국이 돼야 한다. 그런데 IMF는 거시경제 통계시스템을 구축하고 주요 국가 통계를 공개하는 것을 가입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이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어줘야 한다”며 “데이터의 투명성을 확보해 WBㆍIMF 등에 가입할 수 있게 해야 민간자본 투자도 가능해진다”고 언급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은 자체적으로 경제ㆍ무역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 데다, 그나마 부분적으로 공개하는 통계도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북한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통계의 투명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통계청은 북한의 제안에 따라 2020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공동으로 북한 인구조사를 진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통계청은 지난달 말 ‘2020년 북한 인구 및 보건ㆍ행동조사’ 기본추진방향을 세우고 실무 준비에 들어갔다.

기재부·통계청 외 다른 부처도 소리 없이 속도를 내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북한과의 식량ㆍ에너지ㆍ자연재해 등에 대한 공동연구와 북한 내 통신 인프라 구축 등을 남북 교류 아이템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우정사업본부는 남북 서신 교류를 추진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남북 간 건강 격차 해소를 위한 보건의료 분야의 교류, 국토해양부는 노후화된 도로ㆍ철도ㆍ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 재정비, 해양수산부는 서해안 남북 공동어로구역 조성, 문화관광부는 예술ㆍ스포츠 교류 등을 검토 중이다. 산림청은 이미 별도로 조성한 양묘장에서 북한 산림복구용 종자를 확보한 상황이다.

수출입은행은 남북 경제협력을 지원하는 북한ㆍ동북아연구센터의 연구 인력을 충원하는 등 산하 공기업도 움직임이 분주하다. 한국전력 관계자는 “개성공단 운영이 재개될 경우 전력 공급에 나설 준비를 내부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북측이 전력문제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만큼 대비 중”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2015년 남측 문산변전소와 북한의 평화변전소를 연결한 선로를 통해 연간 1억9100만㎾h의 전력을 개성공단 124개 입주 기업 등에 공급한 바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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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북제재가 풀린 후 경협의 속도를 내기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마련하라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각 부처는 철저히 ‘로키(low-key)’로 진행하고 있다. 즉각적인 실행을 염두에 둔 게 아닌 남북 경협 재개를 대비하는 차원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브리핑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아직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은 탓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장관급 인사는 “장관급 회의에서도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긴 했다”며 “그러나 대북제재가 풀린 후 경협의 속도를 내기 위해선 정책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교류의 물꼬를 틔우고, 북한 입장에서도 필요하며, 국제 사회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는 3개의 원칙을 토대로 부처마다 방안을 추리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북 정책과 관련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라면서도 “다만 정교하지 않은 아이디어 차원의 방안을 내놓는 것은 남북 교류에 우리만 몸 달아하는 것 같은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손해용ㆍ서유진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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