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칠칠맞은 여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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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민을 들어 주면서 그에 관해 참견하고 진단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날의 주제는 ‘칠칠맞아도 너무 칠칠맞은 여친’이었다. 연애를 지속해야 할지 고민하는 남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얘기인즉슨 똑똑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음식을 먹다 옷에 흘리거나 길바닥에 가방을 뒤엎는 등 실수를 연발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것이었다. 남친 집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가구를 긁고 화장품을 흘렸다는 사연에 이르러서는 토론자들도 탄식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라면 그 여자친구는 사실은 칠칠맞은 여친이 아니다. 칠칠맞은 여친은 아무 문제가 없는 여친이다. ‘칠칠맞은 여친’은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진 여자친구’의 뜻이어서 프로그램 내용과 맞지 않는다. ‘칠칠맞다’는 ‘칠칠하다’와 같은 뜻의 단어로,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그램 내용에 맞게 하려면 ‘칠칠맞은 여친’이 아니라 ‘칠칠맞지 못한 여친’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반듯하거나 야무지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즉 실수를 연발한다면 ‘칠칠맞지 못한’ 또는 ‘칠칠하지 못한’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

‘칠칠맞다’ 또는 ‘칠칠하다’는 원래 나무·풀·머리털 등이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뜻으로 쓰인다. “검고 칠칠한 머리가 매력적이다” “숲이 어느덧 칠칠하고 무성해졌다”처럼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가 확대돼 반듯하고 야무지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정적 의미로 쓰려면 반드시 ‘못하다’나 ‘않다’를 결합시켜야 한다. “사람이 칠칠맞지 못해 이 모양이다” “그는 매사에 칠칠하지 않았다” 등처럼 사용해야 한다.

배상복 기자 sbb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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