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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정책에 서러운 세입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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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커리어TF팀장

주정완 커리어TF팀장

뼈아픈 판단 미스였다. 5년 전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겼다. 자녀들이 커가면서 작은 집에선 불편한 점이 많았다. 조금 더 큰 집이 필요했다. 당시 수억원의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느냐, 대출이 거의 필요 없는 전세를 사느냐를 고민했다. 결국 전세를 선택했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한 장면이 됐다.

전셋값은 계약서를 새로 쓸 때마다 뛰어올랐다. 모자란 돈은 은행에서 전세대출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로또’라도 맞지 않는다면 지금 사는 동네에서 집을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집값을 반드시 잡겠다는 정부의 약속에 기대를 걸었지만 실망뿐이었다. 도와주기는커녕 전세 사는 사람들의 불안이라도 부추기지 않으면 좋겠다.

지난주 금융위원회의 전세대출 강화 방안은 압권이었다. 금융위는 ‘갭투자(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투자)’ 같은 투기적 수요를 차단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전세대출을 받는 사람들을 잠재적 투기꾼이거나 투기꾼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면서 부부 합산 소득이 연간 7000만원을 넘으면 전세보증을 제한하겠다고 했다. 청와대 게시판 등엔 30~40대 맞벌이 부부의 상황을 무시한 비현실적 기준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은행 직원들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고 쑥덕거렸다. 그러자 금융위는 하루 만에 무주택자는 예외로 하겠다고 물러섰다. 정책 당국자들의 현장감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유주택자의 전세대출은 규제하겠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집이 있지만 자녀 교육 등을 위해 다른 집을 전세로 얻으려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도 투기꾼으로 봐야 하나 의문이다.

전세대출을 받은 입장에선 금리의 움직임도 늘 신경 쓰인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31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9개월째 동결했다. 개인적으로 대출금리가 낮은 것은 좋지만 걱정도 앞선다. 저금리에 갈 곳을 잃은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더 몰릴 수 있어서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모르는 내용이 아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풍부한 유동성이 (집값을 올리는) 하나의 요인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택시장 과열은 경기적 요인보다는 구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공은 다시 정부로 넘어갔다. 정부는 주택 관련 대출규제를 더욱 강화하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규제는 필요하더라도 디테일이 문제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책상에서 만드는 설익은 정책은 애꿎은 사람들만 힘들게 할 뿐이다.

주정완 커리어TF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