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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개혁의 출발점, 판결문 공개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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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지방 소도시의 A시장이 뇌물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항소했다.

지지자였던 시민 B씨는 분노해 A시장이 어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B씨는 어떻게 판결문을 구할 수 있을까.

1. 서울행 기차를 탄다. 서초동 대법원 내에 있는 법원도서관을 찾아간다.

2. ‘A시장, 뇌물’ 등의 키워드로 판결문을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는 4대뿐이다. 4대는 전국의 2만 명이 넘는 변호사, 연구자, 기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판결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B씨는 종일 검색대에 자리를 잡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예약 가능한 시간은 두 달 뒤다.

3. 인내 끝에 ‘사건번호’를 찾아 ○○지법에 수수료 1000원을 내고 판결문을 요청한다.

4. 이제 “재판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제공이 거부될 가능성과 “비실명화에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이유로 늦게 제공될 가능성만 남았다.

해당 법원에 “A시장의 뇌물 혐의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달라”고 요청하면 어떨까. 답은 어김없이 “사건번호를 알아 오세요”다. 화가 나 헌법재판소로 달려간 이도 있었다. 법원의 거절이 위헌적이라는 주장을 헌재는 모두 각하했다. “4000만밖에 안 되는 국민들에게 무려 4대의 컴퓨터를 주지 않았소.”

대한민국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돼 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법원이 거부할 수 있다. 법원의 판결 공개 의무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알 권리’에 맞닿아 있다. 그동안 법관 권력은 국민의 기본권과 맞서온 것이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판결문 공개를 꺼리는 법관의 심사를 “엉터리 판결을 들킬까 봐”라고 풀었다.

1심 판결문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게 되면 그 허술함도 쉽게 드러나고 평가될 ‘우려’가 있다. 전관 변호사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어려워지고 변호사단체나 언론에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 코드 인사도 티 나기 쉽다. 뒤집어 말하면 1심 판결문 공개 확대 없이는 ‘인사 투명성 제고’ ‘전관예우 방지’ 등 사법부 개혁의 핵심 과제들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 21일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위원장 이홍훈)는 의미 있는 권고안을 냈다. 사건 당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도 하급심 판결문을 판결 확정 전에 키워드 검색으로 찾아볼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모든 법원에 10대 이상의 키워드 검색용 컴퓨터를 설치한다”고 못 박길 바란다.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허용하는 투명성 확보가 사법 개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