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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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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야자수의 녹색이 그래서 더 짙어 보입니다. 수영장엔 사람도 없습니다. 선베드는 비어있고, 건물 창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비칩니다. 한낮 햇살이 너무 뜨거운 탓일까요. 대신 물보라가 보입니다. 아, 사람이 있긴 있었는데 막 물에 뛰어든 걸까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무더위 날려주는 시원한 소리가 들립니다. ‘첨벙!’ 사람도 소리도 숨어있는, 이 그림의 제목입니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사진)입니다. 요즘 그림처럼 쿨하지만 알고 보면 반세기 전 것입니다.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 옆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전쟁 후의 회색조에서 벗어나 1960년대의 낙관주의·젊음·색채를,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만큼 잘 보여준 작품도 없을 거다.” 그림을 그릴 당시 호크니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수영장에 반해 4년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물던 참이었습니다. 수영장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은 연작 중에서도 가장 커서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이란 제목이 붙었습니다. 가로·세로 243㎝ 정도라 그림 앞에 서면 실제 다이빙대 위에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 겁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242.5x243.9㎝), 1967,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미술관 소장.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242.5x243.9㎝), 1967,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미술관 소장.

한데 재밌는 건 수영장에서 스케치한 게 아니라 수영장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설렁설렁 그린 건 아닙니다. 2주나 걸렸는데, 호크니는 자서전에서 “2초나 이어질까 싶은 찰나의 장면을 아주 느린 방식으로 그린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돌아봤습니다. 그저 사진을 화폭에 옮기자고 2주나 씨름한 건 아니겠죠. 그보다는 투명하게 일렁이는, 덧없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답니다. 올해 여든한 살 호크니는 여전히 사진과 경쟁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그린다는 점. 화풍만큼 쿨한 노화가입니다.

이번 여름은 독하게 더웠습니다. 그림 속 수영장에 다 함께 ‘첨벙’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요. 그래도 다행인 건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폭염은 끝날 것이고 여름은 곧 잊히겠죠. 밤낮 가리지 않는 더위와 사투를 벌이고 이 신문을 집어 든 여러분의 아침이 호크니의 그림만큼 시원하고 상쾌하길 바랍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