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사면 ″정의의 행동″아닌 ″자비의 조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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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4년9월 「리처드·닉슨」전대통령에 대한 「제럴드·포드」미국대통령의 사면은 미국 역사상 또는 법률상 전례가 없었던 충격적인 조치였다.
당시 「닉슨」은 이미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상태였다. 그는 하원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위해 청문회를 열고 급기야 법사위가 「닉슨」 탄핵권고결의안을 의결, 본회의에 넘기는 사태에 이르자 백악관을 물러난 것이다.
「포드」는 그로부터 대통령자리를 승계한지 한달째 되는 일요일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사면조치를 발표했다. 「닉슨」이 재임기간 중 『저질렀거나, 범했을지도 모르거나 또는 가담했을지 모르는 모든 범죄』에 대해 무조건의 사면을 베푼다고 결정했다.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미합중국에 대해 저질러진 범법행위에 사면할 권리를 갖는다』는 헌법 제2조2항에 규정된 대통령권한이 근거였다. 「포드」의 사면이유는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에 대한 처벌을 사실상 이미 충분히 받았으며, 따라서 「닉스」뿐 아니라 국가가 더 이상 이 스캔들로 인한 처벌을 받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포드」는 자신의 조치가 물론 「정의의 행동」은 아니나 「자비의 조치」라고 밝혔다.
「닉슨」의 비극은 대통령재선선거에서 비롯됐다. 그의 공화당선거본부장 「존·미첼」전법무장관이 「고든·리디」라는 사람을 선거고문으로 채용했다. 「리디」는 상대당도청 등을 포함한 선거전략을 실천에 옮겼다. 민주당선거본부인 워터게이트호텔에 도청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하수인들이 체포됨으로써 워터게이트사건의 화선에 불이 붙은 것이다.
오늘날까지 누구도 「닉슨」이 범행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에 관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범행이 밝혀지자마자 백악관은 범행과 유관한 서류를 전부 파기하는 등 범행은닉에 나섰지만 불은 즉각 백악관으로 옮겨 붙었다.
사건이 발생한 72년6월부터 대통령을 사임한 74년8월까지 「닉슨」과 미국의 홍역은 줄기차게 지속됐다.
관련 녹음테이프를 못 내놓겠다고 발버둥치는 「닉슨」에 대해대법원이 제출명령판결을 내리고 의회가 탄핵청문회를 진행하면서 「닉슨」은 빗발치는 비난의 구렁텅이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닉슨」은 하는 수없이 사임함으로써 회의탄핵은 면했지만 재판이 시작되면 또다시 1∼2년동안 여론비판에 직면해야할 운명이었다.
「포드」는 사면을 발표하면서『「닉슨」씨가 배심원의 공정한 재판을 받기 전까지는 또다시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고 『이 같은 소송을 겪다보면 국민은 의견대립으로 갈라지고 정부의 신뢰성이 도전 받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조치를 정당화했다. 「닉슨」은 사면 「수락」성명을 통해 워터게이트사건처리에 있어 단호하지 못한 점에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막상 「포드」는 이 조치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타격은 「해리·트루먼」의 한국전지연, 「린든·존슨」의 월남전과 비슷한 정치적 업보로 그에게 작용했다.
「닉슨」이 사건개입을 명백히 시인하고 법적 처리 절차가 완결될 때까지 사면을 유보했어야했다는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옹호론자들은 탄핵조치로까지 밀고가는 것은 미국의 불행이라고 맞섰다. 결국 「포드」는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다음선거에서 「지미·카터」에게 패배하게 되어 미역사상 한번도 선거를 거치지 않고 정·부통령을 역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실제 미역사상 대통령탄핵은 소추가 꼭 한번 있었을 뿐이다.
1868년 하원이 「앤드루·존슨」대통령의 탄핵을 소추했다. 그러나 하원탄핵소추는 형사소추로 말하자면 기소에 해당한다. 상원의 탄핵의결이 있어야 물러 앉힐 수가 있는데 「존슨」은 상원의결을 한표차로 피함으로써 대통령직을 지켰다. 어쨌든 대통령 또는 전직 대통령이 사면대상에 오르는 등의 사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희귀한 일이며 불행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한남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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